법고창신의 정신을 아로새긴 이배용위원장님과의 창덕궁나들이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배용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님께 들려주시는 창덕궁 이야기를 듣기위해 창덕궁을 찾던 날, 하루종일 무심한 비가 내렸었다. 오후면 개일거란 일기예보는 바람둥이의 사랑고백처럼 여지없이 빗나갔다. 지난번 경복궁을 찾을 때는 머릿카락 사이까지 파고드는 따가운 햇볕과 현장학습을 온 아이들의 인파에 시달렸었다면,  이날은 카메라만 들면 렌즈 위로 뿌려지는 빗방울과 우산 든 손에서 느껴지는 부자유스러움이 꽤나 신경쓰였던 하루였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경북궁에 갔던 이후로도 우리 것을 즐겨찾으리란 다짐은 마음에서만 맴돌았을 뿐, 이날까지 다시금 행하지 못했던 마음에 괜시레 엉뚱한 비에 투정섞인 짜증을 냈다. 제발 저린 도둑이 애먼 사람 잡는 격이려니... 못난 마음에 남몰래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못난 마음을 아셨는지 이배용위원장님의 첫말씀은 "비오는 날의 수채화처럼 비오는 날 고궁을 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느 날씨를 주시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고궁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이곳에 새겨진 우리의 자랑스러운 정신문화 유산을 찾아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이라는 걸 생각하세요." 였다. 이럴 때 속내를 들켰다라고 표현하는 것이겠지?! 달리 생각하면 비가 온 덕분에 한적해진 고궁을 걸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비내리는 창덕궁

 

1392년 조선왕조가 건립된 후 최초의 궁궐로 3년 뒤인 1395년 정궁인 경복궁이 지어졌으며 이후 1405년 분리되어 지어졌다는 의미의 이궁으로서 2번째 궁궐 창덕궁이 세워졌다. 이후 3개의 궁, 덕수궁, 경희궁, 창경궁이 차례로 지어지면서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 도시 중심에 한 나라의 5대궁궐(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경희궁, 창경궁)과 함께 종묘가 같이 존재하게 되었다. 세계에 내놓을 자랑거리이며, 우리의 자긍심이라 하겠다.

 

 

 

창덕궁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문화유적지를 찾을 때면 가슴깊이 새겨야 할 점들이 있다.

 

그 처음은 우리 문화에 주인의식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문화에 대한 본질을 잘 파악하고, 그 뜻을 잘 아로새겨놓아야 가능한 일이다. 요즘 K-POP이 국위선양을 한다고 연일 각종 매체에서 보도 중이다. K-POP의 이끄는 힘에 이제 나가야 할 것은 고품격의 우리 역사문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동양문화 내에서의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서양과는 다른 동양문화의 특징을 들자면 불교문화도 있지만 유교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소통과 화합의 가르침을 바탕으로한 유교문화는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꽃피웠다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조화, 사람과 사람간의 조화, 임금과 신화와 백성의 조화, 과거, 현재, 미래의 조화에서 찾을 수 있는 소통과 화합의 문화는 바로 궁궐문화에서 가장 농축되어있다 볼 수 있다. 궁궐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유교문화의 진수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세번째는 자연과 사람 간의 소통을 들 수 있다. 자연과 한몸을 이룬 듯한 기막한 디자인 속에서의 창덕궁은 자연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존중심을 느낄 수 있다. 창덕궁을 비롯, 궁궐을 다니다보면 입으로만 떠드는 환경보호를 넘어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에 동화되는 법을 배울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네번째로는 두번 다시 나라를 잃어선 안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반세기 정도의 침탈만으로도 우리나라 문화는 얼마나 많이 훼손되고, 변형되고, 없어졌던가? 그나마도 찾았기 때문에 새로 복원하고, 지금껏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유산을 되새겨 볼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일례로 창덕궁만해도 창덕궁이란 엄연한 이름 대신 1904년 창덕궁 뒷편 후원관리사무소의 이름인 비원으로 낮춰 불러야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르신들의 경우 조선시대를 이씨가 왕권을 찬탈해만든 나라라 업수이 여기도록 일본이 부르게끔 한 이조시대라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라를 잃으면 단순히 땅만 잃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못 지키고, 우리 나라를 못 지키면 우리 문화도 잃고, 우리의 자긍심도 잃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문화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우리들에게 끊임없는 교훈을 주는 존재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묻어나는, 조상들이 물려주신 자랑스런 우리의 정신유산을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이어 미래에 알려주어야 한다.

 

 

 

 

창덕궁을 담자!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현무 / 남 해태

 

경복궁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듯, 궁을 들어가려면 시냇물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경복궁엔 영제교가 있듯, 창덕궁엔 금천교가, 창경궁엔 옥천교가 있다. 궁 입구에 연못이 있는 이유는 일부러 연못이 있는 자리에 궁을 세운 것이 아니라 궁으로 관리들이 들어올 때마다 마음을 씻어 공명정대한 정치를 하도록 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다리 양쪽으로는 북쪽엔 현무(거북이), 남쪽엔 해태를 세워 거북은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악귀를 막는 역할을 했으며, 해태는 다리를 지나는 이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토록 했다고 한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인정전

 

겉으로 보면 2층이나 안에서 보면 통층으로 되어있는 인정전 위에는 용마루 부분을 보면 오얏꽃이 박혀져 있다. 이는 순종 즉위 후 순종이 창덕궁에 머무는 동안 조선왕조의 왕씨인 오얏 이(李)를 빗대어 박은 것으로, 일제 시대 대표적인 우리정신문화 찬탈의 사례라 하겠다.

 

용마루 양끝을 보면 물고기 형상을 한 치미가 있다. 이는 궁궐에 불이 나지 않았으면 하는 의미로 주로 물과 관련된 조각상을 많이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처마끝에 있는 잡상(일명 어처구니)은 서유기의 등장인물들이 올라가 있는 것으로,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환란의 시대를 정리하듯, 풍파를 잘 헤쳐나가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드므, 불귀신을 쫓는 의미로 설치

 

방화수로 궁궐 앞에 설치되어있지만 사실 상징성이 강하다. 과거 자연재해를 비롯한 온갖 재해들은 귀신의 소행이라 생각했었다. 불 역시 불귀신이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렇게 궁 앞에 드므를 설치함으로서 불귀신이 지나다 물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른 불귀신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길 바라는 마음에 설치한 것이라도 한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선정전

 

세종대왕은 1418년 22세의 나이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즉위식은 경복궁에서 했으나 이듬해 집현전 설치 후 10년 가까이 창덕궁 선정전에서 정치를 하였다. 세종 초기의 많은 정치적 구상은 이곳에서 다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선정전이 특별한 이유는 조선 궁궐 건물들 중 유일하게 청기와 지붕을 얹어져있으며, 복도가 설치된 것에 있다. 선정전의 기본적인 공간은 편전으로서 일상적인 업무를 하는 곳이나 임금이 승하하셨을 경우 안치를 하고 자리를 내려놓는 상청의 기능도 겸하고 있어, 다른 궁궐의 건물들과는 다른, 한차원 높은 의미의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복도가 설치되었으며,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모아 양로회를 했던 효의 자리이기도 했다. 이때 부른 노인들은 신분고하, 남녀차별없이 불러모았기에 사회통합의 공간으로도 여길 수 있다 하겠다.

 

 

대조전

 

희정당 뒷편에 위치한 왕비의 침실인 대조전으로 위대한 창조라는 의미가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희정당보다 지대가 높은데, 여자가 남자보다 높다는 뜻도 있는 반면 자연 그대로 두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건물을 세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쪽방은 임금과의 합궁을 위한 방이며, 평소 생활하는 방은 서쪽방에서 하였다고 한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낙선재의 장락문에서 바라본 상량정

 

장락문의 현판은 길고 즐겁게 오래산다는 의미로,  대원군이 글씨를 새겼다. 장락문에서 바라보는 낙선재는 한폭의 그림과 다를 바 없어 이배용위원장님의 칭찬이 끝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상량전의 화려함을 돋보이기 위해 낙선재엔 단청이 빠져있다. 각기 튀기 위해 애쓰기보단 조화로움을 먼저 생각한 디자인이다. 또한 이곳은 궁궐에 상이 있을 때 여인들이 머무르는 곳으로도 활용되었기 때문에 다른 건물들에 비해 많이 얌전하다. 용도와 쓰임에 따라 뿜어내는 건물의 느낌까지, 조선의 궁궐엔 어설픔은 없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상량정

 

상량전의 겹처마

 

상량전은 꽃봉우리 모양의 낙양각 장식이 되어있는 육각형의 정자로 지붕이 겹처마이다. 이곳은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공간으로 만물을 관장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만물을 관장하기 위해선 만물을 보듬고 품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곳에선 그런 마음가짐을 갖기 위한 공간인 것이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보름달 모양의 만월문

 

문 또한 상량전에서 새긴 마음을 다시금 되새기는 역할을 한다. 편협마저도 보름달처럼 둥글게 잘 감싸안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 양쪽 위에는 포도와 다람쥐가 새겨져 있는데, 포도는 자손번성을 의미한다.

 

 

후원 속으로

 

왕자의 독서실까지 둘러본 후 비원으로 한동안 불리었던 창덕궁의 후원으로 들어갔다. 후원은 사전예약을 해야 관람이 가능하다. 약간의 수고스러움이면 이후 포스팅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후원의 모습과 가르침을 모두 느낄 수 있으니 꼭 누려보시라.

 

 

부용지

 

후원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보면 가장 만나는 곳은 부용지이다. 이곳에는 부용정과 함께 과거시험을 치루고, 임명을 하던 영화당, 관리 임명 후 관리들이 드나들 수 있었던 규장각 등이 있다.

 

 

 

이 부용지가 가지는 의미를 한눈에 보여주는 풍경이 있는데 먼저 연못 한켠에서 잉어가 새겨진 돌을 찾아보자. 이는 어병성룡이라하여 물고기가 물을 뚫고 올라가면 용이 된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본 후 관리로 발탁되면

 

 

맞은 편에 보이는 어수문을 지나 규장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수문 현판 바로 아래엔 황룡과 청룡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선비들의 기개를 키워주기 위함이라 하겠다.

 

 

영화당

 

영조가 친필로 쓴 현판이 달려있으며, 과거 시험장으로 쓰였다. 이렇듯 부용지 주변엔 인재등용과 관련된 장소와 건물이 가득하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펌우사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펌우사 앞에는 왕자들의 팔자걸음을 연습할 수 있도록 돌로 런웨이가 꾸며져 있다. 위풍당당 넓은 걸음걸이의 연습은 이상은 높게, 마음은 넓게 가지며 걸음을 걸으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호연과 배려의 정치를 강조하는 정신이 담겨있다 하겠다.

 

위풍당당하나 조금은 거만한 걸음으로 펌우사 앞에 도달했다면 이제 이 거만해진 마음을 다스릴 공간, 펌우사가 나타난다. 펌우사는 어리석은 마음에 돌침을 놓는다는 말로, 위풍당당하나 거만해지지 않기를, 자신을 낮추나 이상을 높게 가지기를 염원한 마음이 담겨있다 하겠다. 덕의 정치를 행할 수 있도록 포용과 겸손의 중요성을 깨닫게 만드는 정자인 셈이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옥류천

 

드디어 이배용위원장님과 함께 한 창덕궁 나들이의 끝인 옥류천에 다다랐다. 북악산 동쪽 봉우리인 응봉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인조가 팠다는 어정을 지나 다시금 흘러내려간다. 그래서 이곳엔 인조가 쓴 '옥류천' 글씨와 함께 숙종의 시도 새겨서 전해지고 있다.

 

 

청의정과 청의정 앞의 논

 

옥류천 가장 안쪽엔 초가지붕의 정자, 청의정이 있다. 이 앞에는 왕과 왕자가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논이 꾸며져 있다. 2평 남짓한 이곳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백성들의 고단함을 몸소 체험했던 것이다. 여기서 수확되고 남은 볏짚은 청의정의 지붕으로 만들어졌으며, 지붕은 팔각에서 시작, 육각, 사각, 원의 형태로 모아진다. 세월이 지나면서 다듬어지는, 순리와 이치를 깨닫게 하는 공간인 셈이다.

 

 

 

600년의 세월을 이 궁궐 안에서 보냈을 고목. 이 자리에 서서 나라의 흥망성쇠와 외세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상처입었을 이곳이 다시금 우리들의 손으로 조금씩 복원되어온 모습까지 지켜보며 커왔을 것이다. 그리고 자라면서 그 안에 배워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새겨오지 않았을까? 그저 오래된 나무로 지나쳐버리기엔 담긴 역사가 크다.

 

 

 

이배용 위원장님의 말씀처럼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고 새로운 현재를 시작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우리가 뿌리내리고 새로이 자라는 이곳이 바로 그 과거들이 쌓여져있는 곳임에 우리가 먹고 자라날 양분 또한 그 과거에서 오는 것임을 잊어선 안되겠다.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과거를 배워 현재를 살고, 미래를 이어가자! 

글쓴날 : [11-07-17 15:45] 이희진기자[mh950621@naver.com]
이희진 기자의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