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8일 새벽5시..건청궁의 그장면을 그려봅니다

경복궁 1일 문화해설사로 나선 이배용 국가브랜드위원장은 또한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 위원장 입니다. 국사를 필수과목에 다시 넣는 성과를 거두었지요. 부드러움 속에 강한 저력이 옅보이는 이 분이 짚어주는 경복궁 현장의 역사가치는 의미 깊고 새로웠습니다. 가장 큰 의미를 둔 곳은 건청궁, 을미시해의 현장이었습니다.

 

경복궁 건물 중 용마루가 없는 두 건물이 있는데, 강녕전과 교태전입니다. 용마루가 없음은 무한의 세계~영속성을 나타낸다는 의미가 있고, 임금이용인데, 용마루를 두면 하늘의 氣를 차단시킨다고 해서 없애는 건물을 짓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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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침전인 강녕전, 바로 뒷 건물이 왕후의 중궁전인 교태전입니다. 교태란왕에게 교태부린다는 뜻이 아니고 주역의 패 이름이랍니다. 합궁일에 임금이찾아오실 때만 동쪽 방을 쓰고, 왕후 혼자는 서쪽방의 침상에 든다고 합니다. 대소 연회와 궁 안의 생활을 총 지휘 하던 곳이지요. 원래의 교태전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져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이 되었고, 지금의 이교태전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지만, 아래의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을 재건할 때 세운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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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보물 제 811호 아미산의 굴뚝

최고 아름다운 교태전 후원에 왔습니다. 경회루를 세우면서 연못을 판흙으로계단식 정원을 만들고 6각형의주황색 굴뚝을 4개 만들었습니다.육각의 각 면은 네 가지 종류의 무늬로 구성되었는데, 굴뚝 제일 아랫부분은거북이 호랑이 등을부조한 사각형의 벽돌을 끼웠고, 그 위의 직사각형 회벽에사군자를조각했어요. 그 위에 다시봉황과 귀면등이 부조된 네모 반듯한 벽돌을 끼웠고, 윗부분은 회벽에 당초문으로 구성되었는데,여간 아름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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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함월지(涵月池)로 달이 담긴 호수, 돌로 만든 시적 상상의 호수입니다. 오른쪽은 낙하담(落霞潭)이며 노을이 비추이는 연못이란 뜻입니다. 대청에 앉아 이 후원을바라 보다가 눈을 감고침잠하면 달이 뜬 호수와 석양이 비치는 연못이 보일 것입니다. 왕비와 공주, 왕자들의 인성훈련장이라 할 수 있는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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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미적 감각이 오롯이 드러났다고 할까요? 연푸른 춘색 아래 눈부시게아름답습니다. 아미산 정원은 화초와 수목, 돌에 새겨진 동식물 모두 함께 어우러진 신선이 사는 자연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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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 경복궁을 지은후,이방원이 추대한 형, 정종은 경복궁 아닌 개성에서 즉위하였는데, 정종의 양위로 태종이 되고보니 경복궁은 부담스러운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태조 이성계도 함흥에 머물구요, 그래서 1411년 태종은 경회루 연못을파는 작업부터 시작하고 경복궁에 들어왔나 봅니다.

 

경회루를 받치고 있는 각이진 24개의 기둥, 그리고 내부에 있는 24개의 둥근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합니다. 이곳에서 외교사절로 연회에 참석하고 돌아간 류쿠왕국의 국빈이 경회루 연못에 비치는 달빛이 장관이더라고 평가했대요. 경회루 연못이 사각형인 대신,연못의 섬들은 둥근형태입니다. 이 역시 하늘과 땅의 조화를 생각했고, 물이 둥근 섬을 돌며서 순환, 정화가 되게 한 배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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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에 치우, 아래로 용두와 잡상이 한쪽에 11개씩 있습니다. 잡상은 서유기의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으로 모험심이 강해서 세상 견문이 넓은 인물들이지요. 천지를 떠도는 잡신이나 귀신을 잡아 궁궐을 지키는 일종의 군사들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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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앞의 이건물은 修政殿입니다. 단종이 세조에게 옥쇄를 넘겨 준 곳, 세종이 한글연구에 골몰하다 잠이 든신하에게 용포를 벗어 덮어주고 나왔던 마음 따뜻한 전각입니다. 갑오경장이후에는 군국기무처가 되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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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전에 건물이이어져 있었으나 복원 못하고 잘라져 있는 증거가 보이지요. 오른쪽으로 넓은 숲 정원이있는데요, 이곳 모두 부속 전각들이 있었는데, 일제의 경복궁 축소로 사라진 곳이라고 합니다. 경복궁은 현재 5분의 2 가량만 복원되었다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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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자선당은 세자궁입니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 오쿠라호텔 주인이 건축 자재를 일본에 옮겨다가 자기 별장으로 개조해 썼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에 불타버렸다고 해요. 일제는 대를 끊어 없앨 욕심으로세자궁을 없애고 팔아 먹은 모양입니다. 1995년 삼성재단이 돈을 대어 289개의 불타고 남은 초석들을 경복궁 뒷산으로 옮겨왔답니다. 목조는 불탔으나 돌은 제자리로 귀향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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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을 찾은 돌

 

저 누런 받침돌이 귀향한 초석입니다. 돌이 가고싶어 일본까지 간것도 아니요, 영혼이나마 돌아 온 것이지요. 국가 브랜드 위원장은 이 세자궁이었던 자선당이 가장 한산한 곳이되어 아쉽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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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의 꽃담

 

대비,대왕대비 할머니들이 거처하던 곳입니다. 흥선군의 아들 고종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도 이곳에 거처하던 대왕대비마마의 숙고와 계략과 결정에 있었겠지요. 대왕대비들은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여, 그 기원이 꽃담에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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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 810호 십장생굴뚝

자경전은 왕실 최고 어른인 대비의 침전으로 많은 온돌방에서 나오는연통을 모아 하나의 큰 굴뚝이 된 형상입니다. 교태전의아미산 굴뚝과는 배치가 아주 다르지요.벽그림의 표현 속에서 그시대의 우주관과 삼라만상의 조화를 살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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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연통을 함께 모으고 중앙에 큰 화면을 만들어 소나무, 거북, 불로초 등 십장생 벽화를 새겨두었어요. '나이많은 여주인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한폭의 정교한 벽화' 라 할 수 있답니다.

 

불가사리는 악귀를 막아주고 학은 장수, 박쥐는 부귀를 뜻한다지요. 사자, 학, 사슴, 거북, 연꽃등 다양성 속에 함께 가는 모습, 꿈 속에서도 기뻐서 전진하는듯한 모습 등 왕실의 번영과 안위의 기원이 오롯이 담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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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정의 향기는 멀수록 그윽하고, 취향교에선 향기에 취해 걷는도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이 가까운 곳, 북악산이 바로 삼각산 형태로 굽어보는 곳, 바로 왼쪽 옆으로 임금의 도서관이 있어서, 독서를 하던 왕은 머리를 식힐겸 이 향원정 못가를 산책하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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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진원샘

 

향원지의 근원이 되는 샘터랍니다. 경회루연못을 거쳐서 궁궐 밖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샘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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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기발상지

하도 잘 꺼졌다 켜졌다 해서 '건달불'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대요. 1879년 토머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만든지 8년만에 조선 궁궐에 환한 빛을 넣어줬어요. 처음에는 향원정의 물을 먹고 불이켜졌다고 해서 '물불'이라고도 불렀대요. 에디슨은 조선국의 전기가설 요청편지를 받고, "세상에! 동양의 신비한 왕궁에서 내가 발명한 전등이 켜지다니 꿈만 같도다." 라고 일기에 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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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맑고 푸르다! 고종임금의 거처였던 건청궁에 왔습니다, 드디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지라 모두들 별로 말없이 들어가 장안당에 섰습니다. 건청궁은 고종의 침전인 본래의 건청궁과 민왕후의 거처인 곤영각을 에워 싸고 있던 부속 전각들을 통털어 건청궁이라 했습니다. (안상궁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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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3국간섭으로 遼東半島를 포기하자 국제정세를 파악한 조선정부는 일본세력에서 벗어나고자,급격히 친러시아적 방향으로 기울었습니다.) 일본은 정한론의 마지막 작전으로 대침략 프로젝트를 감행하게 됩니다.

 

여우사냥. 명성왕후는 일본에 저항하던 마지막 보루이자 그들의 눈에는 가시같은 존재였지요. 일본은 무인 출신인 미우라 고로 총독을 조선에 파견했습니다. 미우라는 민왕후 시해작전을 데리고 온 낭인배들과 한양 주둔 일본군 수비대 병력으로 두달간 연습했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임오군란처럼 위장하여 관군을 죽이고 저들이 준비한 관복을 갈아입고 건청궁으로 쳐들어 왔답니다.

 

수도경비사령관격인 '뮤지컬 명성왕후'에 나오는 용감한 홍계훈은 이 때 싸우다 순직하고 말았습니다.이 몹쓸 무리들은 1895년 10월 8일 신새벽에, 장안당 침소에 있던 왕과 세자 순종의 머리채를 끌며 민비를 찾아내라 다구쳤다고 합니다. 민왕후는 곤영각에서불의의 변을 피하기 위해 나인의 복장을 입고옥호루에서 궁녀들 틈에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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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옥호루

 

사악한 무리들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앞세우고 옥호루에 쳐들어왔는데, 궁녀들의 얼굴을 쳐들게하여 살피다가, 어딘가 기품이 있어보이는 여성을 지목하며,민비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순간 이경직은 팔을 가로막으며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했다고 합니다.

 

일제의 무리는 이경직의 양팔을 칼로 쳐서 잘라 버린 기세로, 민왕후를 무참히 시해하였습니다. 칼로 이마, 가슴을 찔렀습니다. 비슷하게 생긴 궁녀들도 죽여버렸습니다. 그들은 민왕후의 시체를 거적에 말아 건청궁 동쪽에 있는 녹산에서 석유를 뿌리고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이 때 민왕후의 나이 4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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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끝낸후, 미우라는 입궁하여 친일 인물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구성했 습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은페하려 애썼으나, 이 사건을 목격한 미국인 군사교관 W.M.다이와 고종의신뢰를 받던 러시아인 건축가G 사바친의 폭로로 뉴욕 헤랄드 등 국내외에 알려져 일본 입장이 불리하게 되어버렸어요. 하는 수 없이 일본은 미우라 일당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 세웠다가 증거불충분을 명분으로 전원 석방시켰습니다.

 

국어와 국사는 민족의 혼이라 할 수 있다고 국가 브랜드 위원장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문화는 그 나라사람들의 영혼이라구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송두리째, 자존심 밑바닥까지 짓밟힌 사건이 일어난 곳, 명성왕후의 혼이 여기 서려 있습니다. 이런 참담함을 겪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남의 자존심과 혼을 짓밟는 행위는 절대 말아야 겠으며, 여기에 '진정한 평화'라는 대한민국 국가 브랜드 메시지도 담겨있습니다.

 

본문 링크: http://blog.joinsmsn.com/liberum/12194090

 

글쓴날 : [11-05-12 10:50] 손금지기자[Liberum@hitel.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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