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3-국가브랜드위원회 이배용위원장이 들려주는 조선왕조 그 찬란한 역사 속으로~

1편과 2편에 이어 3편 이야기를 계속 합니다.

 

자선당(資善堂)

 

이 곳은 동궁인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 이라고 합니다.자선 이라는 말은 세자 시절부터 지도자가 되려면 선을 쌓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고 해요.

 

일제시대때 일본이 이 건물이 오쿠라 라는 호텔 주인이 이 건물을 떠가서 별장으로 썼다고 해요.1923년 관동 대지진때 건물은 불타고 돌만 남아서 그 돌이 오쿠라 호텔 정원석으로 쓰여지고 있었다고 해요. 이 건물들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을 복원한건데 1995년 삼성이 출자해서 289개의 불먹은 초석들이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건물 곳곳에 보면 이 사진처럼 불에 타서 누렇게 변한 돌들을 보실 수 있어요.

 

 

불 먹은 돌 이라고 부르셨는데 너무 훼손된 돌들은 경복궁 녹산에 배치되어 있다고 하네요.이 돌이 돌아온 것과 함께 모든 헤매던 영혼들도 이제는 돌아온 거였으면, 그리고 왜 나라를 지키고 빼앗기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 하셨습니다.

 

이 돌들을 보면서 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었으면 좋겠다구요.그 많은 관람객들이 이쪽에는 하나도 없이 여기가 한산한 게 너무 마음 아프시다구요.문화는 예술 이전에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있다는 걸 기억하라고 하셨어요.이 이야기를 하실때의 이배용 위원장님의 목소리는 왠지 좀 슬프시더군요.

 

 

자경전 뒤쪽의 자경전 십장생 굴뚝 ㅡ 보물 제 810호

 

자경전(慈慶殿)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 이라고 합니다.건물을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화재로 소실된 걸 1888년 고종 25년에 복원해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라고 해요.자경전은 나이가 많은 여주인을 위한 공간으로 온돌방들이 다른 건물에 비해서 많았는데이렇게 굴뚝을 건물 뒤쪽으로 따로 내고 부조 등으로 장식을 더했다고 합니다.

 

 

십장생과 박쥐문, 당초문을 새긴 굴뚝을 세워 볼거리를 만들고서쪽 담은 주황색 벽돌로 축조하여 내벽에는 만수문, 격자문, 육각문, 오얏꽃 등을 정교하게 새겨 넣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 있는 모양벽돌로 꾸몄다고 합니다.나이 많은 여주인을 위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벽화인 셈 이라고 하네요.각종 과일과 동물들이 대칭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자경전에서 나와서 맨 뒤에 있는 향원정으로 가는 길. 이름 모를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개나리가 늦게까지 만발해 있네요.뒤로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이 보이구요.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입니다.경복궁 옆에 있으니 기회되면 여기도 가보시면 좋을듯 하네요.저희는 조선말 슬픈 역사의 현장인 건청궁을 보러 갑니다.

 

 

향원지와 향원정(香遠亭)

 

고종이 이 뒤쪽의 건청궁을 지을때 함께 만든 연못과 정자 입니다. 향원정이 있는 섬으로 가는 길은 구름다리를 만들어서 취향교 라고 했다고 하구요.지금은 남쪽에 있지만 원래는 북쪽에 건청궁이 있으니 북쪽에 다리가 있었다고 해요.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로 북쪽에 있었지만 6.25때 포탄을 맞아 끊어진 걸 1953년에 다시 지은 것 이라고 합니다.

 

 

향원정 뒤쪽 왼편으로는 고종의 서재였던 집옥재 가 있구요.이 건물들은 다른 건물들과 달리 중국풍으로 지어졌는데 그때 유행이던 건축법을 따른 거라고 합니다.본래는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졌다가 1888년 고종이 경복궁으로 거쳐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옮겨온거라고 하네요.

 

 

건청궁1873년 고종 10년에 와서 지어진 건물 입니다.고종은 명성황후와 우애가 아주 깊었다고 해요.아버지인 대원군으로부터 독립해서 명성황후와 함께 지낼 공간으로 건청궁을 지었다는데 그 건청궁을 사비, 즉 고종 개인의 돈으로 지으며 아름다운 노후를 꿈꾸었을텐데 그 건물에서 명성황후가 비참하게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 입니다.그 때문인지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해 후 건청궁을 다시는 찾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 후 방치되어서는 일제시대때 철거되어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져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어져서 사용되다가 1998년 철거하고2007년 10월 옛 모습을 복원해서 지금 건물을 다시 지어서 일반에 개방했다고 합니다.

 

 

건청궁 입구이 건청궁은 또한 우리나라 전기의 발상지 이기도 한데요.고종의 어명으로 처음 발전소를 설립해서 1887년 3월6일 건청궁에 처음으로 전등을 점화하고경복궁에 750개의 전등을 가설 점등 했다고 합니다.일반 궁궐의 건물들과 달리 일반 사대부집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서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키는 구성을 했다고 하네요.

 

 

왕이 사용했던 장안당임금의 거처였던 곳인데 명성황후 시해시에 이곳에 고종과 왕세자가 감금되었었다고 하지요.

 

 

일정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계시는 이배용 위원장님.목소리를 차분하지만 음성은 조금 떨리고 계셨어요.그 이유는 바로 이 곳이 참담했던 우리나라의 역사의 비극의 현장이기 때문 입니다.

 

 

곤녕합 옥호루

 

1895년 10월8일 새벽 5시. 옥호루는 맑은 물이 담긴 호리병 이라는 의미의 이 이름을 보호하지 못했던 비극이 일어난 곳 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점략한다는 프로젝트가 완성될 무렵적극적으로 저항하던 명성황후를 시해한 곳 이기 때문이죠. 드라마 등으로 다들 아시다시피 여우사냥 이라는 이름으로 정한론을 이루기 위해서 두달 동안 작전을 위해 연습 및 계획을 짜고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비를 죽였다고 음해하기 위해 새벽을 틈타 경복궁부터 기습해서 관군을 죽이고 관복으로 갈아입고 홍계훈을 피살하고 이리로 왔던 거랍니다.

 

이경직 이라는 궁내부 대신을 앞세워 이 곳으로 쳐들어 왔는데 그때 명성황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궁녀들 사이에 숨어있었다고 해요.그러나 미모와 기품을 숨길 수 없어서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찾아내었는데 이경직이 이에 놀라 황후를 두팔로 감싸안았으나 일본인이 이경직의 두팔을 잘라내서 이 자리에서 순직했다고 합니다.우리가 잘 아는 장충단 이라는 곳은 고종이 명성황후를 위해 순직한 이경직과 홍계훈의 혼을 달래기 위해 1902년에 세운 사당 이라고 해요.

 

 

바로 이 옥호루의 앞 마당에서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끌어내 이곳에서 칼로 이마와 가슴 배를 쳐서 이 자리에서 즉사를 했다고 하지요.그리고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비슷한 나이와 외모의 다른 궁녀 둘을 이 자리에서 죽이고 증거를 업애기 위해 뒤쪽 녹산으로 끌고가서 석유로 시신을 불살랐다고 합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고종에게 명성황후가 내정에 간섭이 심해 백성의 반란이 일어난 거라고 명성황후를 폐비하도록 하라고 했다고 해요.시신이 없는데다가 고종이 넋이 나가서 국장조차도 제대로 치루지 못했고 고종은 결국 아관파천 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됐지요.

 

그러나 각종 목격자며 러시아 등의 기술자 등이 들고 일어나자 사실여부를 알아보겠다며 전원 복국 소환해서 조사를 하는 척만 하다가 결국 무죄방면하고 오늘에 이르르고 있지요.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사방은 조용하고 모두들 숨죽여 듣고 있었는데 마당 하늘 위로 까치 한마리가 낮게 돌며 날아가더군요.

 

경복궁의 번영을 꿈꾼 시작부터 건청국의 마지막까지...그러나 마지막까지 이 나라를 마지막까지 가슴에 품고 지키려 했던 명성황후의 영혼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흥망성쇠 라는 말이 절로 생각이 나는데요.연약한 여자의 몸으로도 이 나리의 망과 쇠를 막아보자 했던 명성황후의 죽음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겠습니다.

 

500년을 이어져온 조선왕조의 꿈과 비젼이 침략으로 무너져 내렸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지요.내나라는 남이 지켜주는 게 아닙니다. 다른 나라를 존중하면서도 우리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지켜야 합니다. 문화는 그 나라의 근간이 되는 힘 입니다.우리가 우리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지켜나갈때 우리가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거에요.

 

경복궁은 그냥 서울 시내에 있는 궁궐이 아니었습니다.그곳은 우리 민족의 힘과 저력, 슬픔과 통곡, 기쁨과 환희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말 그대로 우리의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이배용 위원장님의 멋진 설명으로 인해 저희는 좀 더 귀에 쏙쏙 들어오게 배울 수 있어서 더 좋았어요.

 

혹시나 이 봄 아이들과 함께 경복궁을 가보시겠다면 제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시고경복궁 홈페이지도 참고하시구요.조선왕조 500년 그 찬란한 역사 속으로 떠나보세요.(경복궁 홈페이지www.royalpalace.go.kr)

 

이배용 위원장님만큼은 아니지만 홈페이지를 통해서 미리 신청하시면가이드의 한국어 혹은 외국어 안내를 받으실 수도 있어요.혼자 다니시는 것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시면 훨씬 더 도움이 되실 겁니다.이배용 위원장님과 함께 해서 더 의미가 깊고 배운 것이 많은 짧은 여행이었습니다.다음 여행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마야의 놀이터

www.happy-maya.com 

blog.naver.com/sthe2002 

글쓴날 : [11-05-11 15:07] 오지영기자[sthe2002@naver.com]
오지영 기자의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