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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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반 고흐의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1990년대에 읽은 책 중에 프란시스 쉐퍼의 "How should we then live?(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이 있었다. 나는 꽤 심취하여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서양사상과 문명의 흥망성쇠에 관한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 인류는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20세기까지는 하늘에 종교라는 이름과 땅위에는 철학과 예술이란 이름으로 각기 신과 인간을 앞세워 세계를 양분하며 권세를 누리고 위용을 떨치며 살았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은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지혜를 짜내고 지식을 길러 여러 갈래의 학문과 과학을 발전시켰다. 마치 그것이 끝이고 더 이상의 길은 없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개발하고 할 수 있는 만큼 발전시켰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허무하고 암담하고 내일을 약속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1900년대 중반까지나 그보다 지난 2천년 아니 훨씬 더 앞선 몇 천년 전까지는 이성적이 아닌 신화적이거나 미신적인 부분도 받아들여지고 수용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싸우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온 것처럼 평생 싸우면서 이 세상을 살다가 간다. 영혼이나 육체나 쉴 틈이 없다.

 

인간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하면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채찍질하며 고투를 벌인다. 인종이 무엇이기에 색깔로 우열을 짓고 다툼을 벌이며 종족이 무엇인지 혈투를 벌이면서 종족과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이 모든 것은 의로운 행위로 받아들여져서 의인, 의사로 불리어진다. 리비아 사태는 끝 간 데 없는 인간의 욕심의 산물일 테지만 동일본의 쓰나미로 인한 재앙과 그로 인한 원전의 방사능 유출로 수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일련의 사태들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과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미처 손을 쓸 수 없는 특별한 천재지변의 경우에는 대재앙을 면할 길이 없게 된다. 인간의 이기심에서 생겨난 일과 작업에서의 죽음은 최소한의 목적을 위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치더라도 자연의 변화로 인한 천재지변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 가슴이 답답하다. 신의 경고라는 말은 한마디로 언어폭력이다. 인간이 만든 변증법이나 그 무엇으로도 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뉴욕에 있는 나의 대학 동창은 너무나 자신 있게 그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답답한 일이 어디 한 두 가지겠느냐 마는 서로 말과 뜻이 통하지 않을 때처럼 캄캄하고 답답할 때도 없다. 종교를 믿는 자들의 신은 자연재해를 미리 막을 수 있을까. 경고를 하고 미리 보여주고 하는 묵시론 적인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지각변동이나 그런 천재를 바꿀 수는 없다. 인간이 신이 된 것처럼 이 세상에는 신의 형태는 있다. 그러나 우주론적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17세기의 과학자들은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기득권의 권력이 무서워서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들은 팽창하는 우주를 어슴푸레 알고 있었다. 지구라는 작은 별만이 아닌 총총한 수억 개의 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인도네시아나 동일본의 쓰나미로 인한 수십만 명이나 수만 명의 죽음은 무덤도 없고 납골당도 없다. 해마다 벌초하고 성묘하는 연례행사 같은 일들이 사치스러운 인간유희처럼 느껴진다. 하늘나라가 있어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긴 하다만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글쓴날 : [11-04-01 08:42] 김민영기자[Malipres@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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