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에서 머물고 있는 주말에의 일탈을 갑자기 시도하게 됩니다. 충청북도로를 향하는 중앙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발견한 표지판 하나 보고는 제천 톨게이트를 빠져나오게 되니 카톨릭 성지중 한 곳인 배론성지입니다.


배론성지로 들어가는 초입의 다리 하나 막 건너 오른쪽 야산 아래의 십자가 탑이 성지가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데, 배론성지에 도착하면 주차장 끝단에 선 크다란 표지석으로 본격적인 안내를 받게 됩니다.
배론성지-충북 제천

배론성지에 들어서니 아직은 앙상한 나무가지와 얼어붙은 작은 연못 너머로 리오 데 자네이로의 명물인 예수상을 닮은 하얀 석상 하나가 눈부시며 들어옵니다.

교회를 다니는 이유일까요? 두 팔 벌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때마다 느끼는 것은 "죄 짓고 짐진 무거운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는 구교인 카톨릭에 비하여 동정녀 마리아를 신성화 하지 않으니 자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니 카톨릭 성지에서는 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빙결된 연못은 아직도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나 연못을 가로지른 구름다리 건너에 섰는 성모 마리아가 소리없이 진행되는 갈색 겨울의 끝단을 조용히 지켜보며 계절의 변화에 마음을 내려놓고 있는 듯합니다.
배론(舟論)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있는 이곳은 1791년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며 신앙공동체를 이룬 곳으로, 마을이 위치한 계곡이 배[舟] 밑창을 닮았다 하여 배론[舟論]으로 부릅니다.



배 모양의 소성당
배론성지의 소성당의 위용이 대단합니다. 아니, 그 위용보다는 차라리 건축물의 형태가 마치 거대한 선박의 멀미를 닮아 더 웅장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배 밑창 닮은 계곡에 세워진 배 선미 두 척을 닮은 성당입니다.


소성당 뒤편 산등성이로 이어진 로사리오 동산아래에는 최양업신부상이 쳐다보는 앞으로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배론성지의 옛 이야기가 타원으로 이어진 벽면에 사진과 함께 시대별로 설명해 놓았기에 성지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김대건신부에 이은 두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신부



우리나라 첫번째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로 카톨릭 신부가 된 분으로 조선시대의 가톨릭 신부로써 일명 정구(鼎九). 세례명 토마스. 1821년 충남 청양(靑陽) 출생으로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 발탁되어 마카오에 건너가 신학교를 졸업하여 부제(副祭)가 되었으며 1849년 상하이[上海]에서 마레스카 주교의 집전(執典)으로 신품(神品)을 받은 뒤 귀국하여 제천(堤川)의 가톨릭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12년간 사목생활을 하였는데 교리 번역과 국내의 가톨릭교 사료 수집에도 크게 공헌하였다가 장티푸스로 선종한 분입니다.
예수 십자가상과 묵상 기도의 길


나사렛 예수 십자가 상이 땅 위에 놓여있으니 하늘과 맞닿은 골고다 능선 끝단에 십자가가 세워지기 직전의 모습이란 생각을 하니 내심 엄청난 마음 압박을 받게 됨을 숨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대속(代贖)의 현장이기도 하거니와 사랑과 용서와 의(義)를 향한 천국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한 예수 십자가 못박힘 현장에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잠시 묵상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인류 최초로 부활의 역사를 탄생시키는 순간이자 인류의 원죄가 사함 받는 순간이기도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하여 세상은 실로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배론성지의 원적지(源積地)


묵상하며 걷는 기도의 길에 세워진 청동 조소 뒤편으로 하얀 잔설이 남아 계절의 마지막 여운을 말해 주는 듯한데, 로사리오 능선으로 올라가는 기도의 길은 완만하며 느리게 이어진 길이며, 기도의 길 끝에는피정의 평안과 안식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네 옛 선조들이 수많은 박해와 순교를 마다하지 않은 역사의 현장에서봅니다. 초가로 복원된 옛 예배소와 순교의 현장은 언제나 그렇듯이 엄숙합니다.

현재 이곳에는 사제관과 함께 옛 신학당 터와 최양업 신부 묘소, 박해시대의 옹기굴 흔적 등이 남아 있는데, 1932년 몇몇 사제들이 매입하여 보존해오다가, 1977년 원주교구에서 성지개발위원회를 구성하여 개발을 시작했으며 양기섭 신부에 의해 '성요셉 신학당'이 복원되고 각종 기념물이 세워져 지금의순례지로 되살아납니다.
성요셉 신학당

1855년에는 배론 공소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교장 푸르티에 신부, 교사 프티 니콜라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고, 1861년 최양업 신부가 문경(聞慶)에서 병사하자 푸르티에 신부 일행이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습니다.

'성요셉 신학당'은 한문이나 한글뿐 아니라 수사학·철학·신학 등도 가르쳤으며 한국 천주교 교육의 요람이 되었으나, 1866년 병인박해 때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 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폐쇄되었습니다.
옹기굴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이곳 옹기굴에 숨어 있으면서 조선 교회의 박해 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帛書)를 작성하여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느린 걸음으로 배론땅을 밟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완만하게 경사진 금빛 잔디밭은 소성당의 더넓은 앞 뜨락이며 대리석으로 조각해 놓은 성모상 하나가 고즈넉하게 서서 빛 까지 사광으로 내려앉을 그 아래를 쳐다보고 있으니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입니다.


조용하지만 경건하고, 경건한 가운데에 자유함이 가득한 곳이니 이곳을 찾아오는 외지인의 마음까지 자유함을 얻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됨은 배론성지의 느낌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성지내 하얀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배롱나무 가지 끝으로 붉은 꽃망울이 알알히 맺혀가기 시작하면 성지순례를 나선 카톨릭 신자들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잦아들 것 같으니 차라리 한가하기 그지없는 차가운 이 계절에 느린 걸음으로 배론 땅을 밟을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배론성지는 종교적 이념을 떠나서 사의 땅이자 나를 돌아다 볼 수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하니, 잠시 잠깐 지나온 나의삶을 돌아다 볼 수 있다면 성지순례의 시간은 보배로운 시간이 됩니다.
원작성자 : 가을남자 (원글 : http://cafe.naver.com/powerbloggeraliance/7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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