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國人 안중근의사 새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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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 도서관 바로 가까이 안중근의사 새 기념관을 눈 펑펑 쏟아지는 날 방문했다.
중국 여순감옥에서 31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친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기를
기념하여  서울 남산에 새로 건립한 기념관이다. 
 
'한얼'이란 제목의 조형물은 조각가 최만린씨의 작품으로 안의사의
고귀한 희생과 애국심을 숭모하는 마음을 담아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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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고 단정한 형태의 반투명 유리 재질로 된 파격적인 기념관이다.
건물 설계자인 부부 건축가 김선현(38·디림건축 대표)씨와 임영환 교수(41·홍익대·디림건축)는  
역사를 새롭게 다시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일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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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일에 세운 머릿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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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 주변에서 기념관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석재를 쓰라고 했지만 엄숙함만을
강조하기 보다, 단아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반투명 유리(U글래스)를 썼다.
이 재질은 밤이되면 은은한 빛으로 주변을 비춰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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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들은 건물을 바라보며 완만한 경사로를 걸어 내려가서 모퉁이를 돌아야
출입문을 만난다. 안 의사의 유묵이 새겨진 벽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이 길은
왁자지껄한 현실공간에서 경건한 추모공간으로 들어가는 다리 같은 곳이다.”
오른쪽 벽면은 아래 사진과  같은 안의사 필체로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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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 동상과 왼손 약지를 잘라 태극기에 쓴 혈서
 
1909년 무명지(無名指·넷째 손가락)를 끊고 대한독립을 맹세했던 12인의
청년들이 단지동맹을 결성했다. 안중근은 1909년 3월 5일 (음력 2월 7일) 연추
하리(下里) 마을에서 생사를 같이하며 구국운동에 투신하는 동지 11인과 단지동맹을

결행하고 "조국독립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하는 목적으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단지동맹을 결성했던 하리는 현재 크라스키노 쮸카노바 마을에서

훈춘방향으로 가는 길목이다.

▲ 심하게 훼손된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
ⓒ 오마이뉴스 김태경


대부분 의병출신인 '동의단지회' 맹원은 20대 중후반 혹은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명단은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백규삼, 황영길, 조응순, 김천화, 강창두 등이다. 이날 12인의 애국자들은 왼손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태극기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쓴 뒤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안중근의 약지가 잘린 수형(手形)은 이때 단지로 그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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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의거 연출 모형

 
안의사는 9시 30분경 러시아 의장대 뒤쪽에 서 있다가 약 10여보의 거리를 두고 선 자세로
브로닝 권총을 발사하여 이등에게 3발을 명중시키고, 이등을 수행하던 하얼빈 천상 총영사,
삼 비서관, 전중 만철 이사 등에게 부상을 입혔다.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되자 ‘코리아 후라(대한민국 만세)’를 3번 외쳤다. 거사 직후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된 안중근은 하얼빈역 헌병대 분파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에게 심문을
당하다가 오후 8,9시경에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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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이 사람들은 일본인 관광객들이었다. 그들이
여기 온 것도 이채로운데, 이들중의 한명이 안의사상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지
뭔가. 나는 추모실을 구경하고 오느라 그 장면을 놓쳐버렸다. 어쩌면 이분들은
재일동포들이었는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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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의 약지를 단지한 손도장은  대한국인 이름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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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 순국 100주년이 작년이었다. 옛전시관 보다 전시물과 영상물이 세련되고
교체된 게 많았다.  전시관내에서는 촬영금지이므로 전시품 사진은 찍지 않았다.
 
 옛 기념관 포스트 : http://blog.joinsmsn.com/liberum/1096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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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색하고 냄새도 나는 듯 했던 옛집을 헐고 새 기념관을 마련해서 그나마
송구스러움이 덜합니다. 아직 유해도 찾지 못하고 효창공원에 가묘만 남아서...
 
  
글쓴날 : [11-02-22 16:11] 손금지기자[Liberum@hitel.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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