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체결과 헤이그밀사파견의 역사현장 중명전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극장을 지나고 그 굽이를 돌아 골목 안쪽을 들어서면,
대부분의 일반인들께 생소한 '중명전'이란 덕수궁 한자락이 외따로 떨어져 공개되어 있다.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구한말 오욕의 역사현장이자, 고종이 을사늑약이 불법임을 알리고자 헤이그밀사를 파견한 장소도 바로, 이곳 중명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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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가정집은 미처, 혹은 결단코 사넣지 못했던 모양이다. 휑한 마당에는 우물터를 복원해
두었다. 중명전은 1897년경, 황실 도서관으로 탄생한, 궁궐내에 지어진 최초의 양관 건축물 중
하나이다. 화강석 기단에 벽돌로 축조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균형잡힌 건물, 무지개형 창이
명동성당 주교관 건물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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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의 원래 이름은 '漱玉軒(수옥헌)'이었다. King's Library 용도로 짓고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한 후  재건하였고, 다시 1925년 대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또다시 재건하였기에 원래의 설계와 다소 차이가 날 수
있다고 한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손탁호텔 등 많은 개화기 건물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 그가 설계했을 당시 용도와 그 뒤 세월이
흘러가고 시국이 바뀜에 따라 사용된 중명전의 용도는 복잡 기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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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은 정동지역에 있던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에서 임진왜란후 궁궐들이 소실되어
선조가 거처한 행궁으로, 광해군에 와서 경운궁으로, 고종이 거처하면서 덕수궁이 되고 차츰
면적이 넓어졌다가 현재 왼쪽의 진황색 면적으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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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정동여학당터에 중명전 건립, 1904년 경운궁(덕수궁) 대화재로 고종이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김, 1905년 을사늑약 불법 체결로 망국의 역사현장이 되었다. 고종은 1907년 4월 헤이그 밀사(이준, 이위종, 이상설)를 접견하고 밀서를 주어 파견하였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 퇴위를 당했다.

1915년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 훼손하면서 경성구락부(Seoul Union)에 임대하여 1960년대 까지 외국인 사교클럽으로 사용되었다. 1963년 일본에서 귀국한 영친왕 이은과 부인 이방자 여사에게 거처로 기증되었으나, 1976년 이후 민간 기업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뒤 관리 소홀과 개조 등으로 원형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다.
1983년에 이르러서야 서울시 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되어 명목상 문화재로 취급받기 시작했으나 사무실과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등 사실상 방치 상태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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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다. 2002년 서울시 의회가 "투자가치가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매입예산 전액을 삭감함으로써, 한국근대사의  중요 역사유적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2003년 문화관광부가 매입하여 정동극장에 소유권을 넘겨주었다가,  2006년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 제 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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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찐이 우리 나라에 온 것은 조선정부의 통상과 외교를 담당하던 뮐렌도르프의 발탁이었다. 전에 관세청 취재를 갔다가 우리나라 초대 관세청장이 뮐렌도르프였음을 알고, 유교적 문민정치에만 치우쳤던 조선의 허약함이 서글프게 느껴졌었다.
사바찐은  개방된 항구를 통하여 들어오는 교역품에 대해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부두와 해관(海館)을 세우는 건축 및 토목공사 전반을 해야했는데,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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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바찐은 조선에 입국해서 1904년 돌아갈 때 까지
많은 건축을 했다. *제물포 해관 청사, *세창양행 사옥, *제물포 만국공원,
*러시아 공사관, *파고다 공원 조성, *독립문, *홈링거 양행,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 정관헌, *제물포 구락부, *손탁호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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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사바찐을 몹시 신임하여, 제물포 해관에 근무하던 그를 궁궐로 불러들여
경복궁 궁궐 호위대장으로 임명하여 측근에 두었다. 고종은 궐내에 외국인을
많이 두어 일본세력을 견제해 보려는 의도였다. 그후 1년이 지나 사바찐은
민왕후의 시해현장을 목격한 역사적 증인이 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폭도들이 정문으로 돌격해 들어오자 나의 지휘하에 있던
시위대 병사들은 총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함께있던 미국인 '다이" 장군도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족이었다.
결국 혼자가 된 나는 살길을 찾아 헤메다가 일본인 폭도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가
나를 해치지 말 것을 간청하였다....." -사바찐의 회고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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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거처였던 덕수궁 함녕전에서 불길이 발생하여 전각들을 태우자, 고종은
중명전으로 몸을 피했다. 화재이후 고종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가지 않고,
중명전에 머물기를 택했다.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과 가깝고 서양선교사들의
지역이므로 고종은 일제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곳이 여기라고 생각했기에
이곳에 머물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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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국기와는 다르다.
 


1883년 3월6일 고종의 최초 제정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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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3인 : 이준, 이상설, 이위종(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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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창밖으로 본 풍경, 답답했을 고종의 심중 한폭을 보는 것 같다.  
 
곤도 시로스케라는 1907∼1920년 조선 황실 궁내부(왕실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아)에서
관리를 지낸 일본인이 쓴 일기에 친일파 왕족인 윤덕영이 순종의 일본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고종을 압박하는 과정을 “신랄한 책략을 동원해 옛 신하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리한
시도까지 하면서…그 수단의 신랄함, 냉혹함, 거기에 끈질김은 참으로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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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만나고 싶지않았던 일본 사람들 : 이토피로부미, 하세가와 요시미치
(을사늑약을 강요한 일본군 사령관), 일본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등. 
 
나는 '을사늑약'이 아닌 '을사보호조약'으로 국사를 배웠다. 당시 한규설대감이 유일하게
이 불법적 조약에 반대를 해서 왕따를 당하고 미친이로 취급하여 감금당했다고 했는데,
그가 감금당했을만한 방을 찾아보았다. 외진 방은 1층에도 2층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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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11-02-18 18:47] 손금지기자[Liberum@hitel.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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