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과 오동꽃 전설, 대구 팔공산 동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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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동화사 절마당엔 오색 연등이 가득했다. 鳳棲樓, 대웅전 보다 더 먼저
만나게 되는 위풍당당한 누각이었다. 봉황새는 오동나무 가지에만 둥지를 틀고,
오동나무 가지에만 앉는다는 도도한 새, 오동꽃이라는 동화사 절이름과 합을
이룬 봉서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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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얼회원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동화사는 왕의 원당사찰이었다. 그 표지로 기와지붕 주기와 2장이 녹색으로 되어있음을 배웠다.
대웅전 마당에는 임금이 행차했을 때 예를 올리던 배례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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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루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놓인 자연석은 봉황의 꼬리부분을 상징하고,
둥근알 3개는 봉화의 알을 상징한다.  알 셋을 쓰다듬으며 소원을 빌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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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루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군사령부를 설치해 승군을 총지휘했던
곳이고, 한때 영남일대의 사찰을 관할한 '영남도총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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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563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영조시대에 지어졌다. 아름다운 문양의
나무창살로도 유명하다. 오방색 단청중 청색을 좀더 써서 중후한 느낌의
대웅전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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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조선시대 글 읽는 선비를 떠올리게 한다는 단아한 삼존불 머리위로는 화려한
단청에 봉황이 날고 있다. 연꽃모양의 샹드리에가 특히 아름답고 소담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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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난간이 여간 감탄스럽지 않다.  피안과 사바세계의 경계를 상징하는
해탈교를 지나 통일약사대불이 조성된 통일대전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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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으로는 동양최대의 큰 불상이라고 한다. 석불의 몸체 안에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2과를 모셨다.
통일약사여래대불은 1992년 11월에 완공되었고 높이 34m, 둘레 16.5m로서
전북 익산의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다. 대불 앞 양옆으로 경주 감은사지 석탑을
모델로 한 17m의 석탑 2기와 7.6m의 석등 2기가 세워져 있다. 익산으로부터
수십톤의 엄청난 양의 화강암 석재를 옮겨와 아직도 조성이 끝나지 않은 대불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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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대전 유리창에 비친 약사여래대불상...대불의 진신사리가 통일대전을
굽어보시니, 다른 불상이 필요없는 '금강계단'이 된다. 금강계단은 적멸보궁처럼
불상대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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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대전에서 내려가는 108개의 가파른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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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타고 다른쪽으로 올랐던 동화사를,  일주문 쪽으로 걸어내려왔다.
1500 여년전 신라 21대 소지왕 15년(493년) 극달화상이 창립하여, 처음엔
유가사라 불리웠던 절, 그후 흥덕왕 7년(832년) 심지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그당시 겨울인데도 오동나무가 상서롭게 꽃을 피워서 桐華寺라 이름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영조때 지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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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밖의 마애불좌상
9세기경 심지스님이 손수 징을 들고 새겼다는 전설의 마애불이다.
화려하며 기품이 있는 인상, 옷자락까지 무척이나 섬세 유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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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바위에 신라인의 미소를 머금은듯 후덕한 인상의 마애불은
구름을 타고 좌정해 계셨다. 대학생시절 여름방학에 내려와
친구들과 한번 왔었던 동화사, 그땐 뭘보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마애불도 대웅전도 봉서루도 아무 기억이 없으니...

 
 
 
글쓴날 : [11-02-18 18:12] 손금지기자[Liberum@hitel.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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