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의 왕오천축국전-실크로드와 둔황[국립중앙박물관]셋

3부 -둔황과 왕오천축국전-

현세의 삶이 이어지다-아스타나 고분 

현재의 투루판시에서 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스타나 고분에서는 3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지하에 조성된 수백 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을 뜻한다. 죽어서도 현세의 삶이 이어지기를 바란 듯, 무덤의 사방 벽면에는 자신들이 생전에 누리고자 했던 삶을 그려 놓았다. 아스타나 고분 가운데에는 중국 중원에서의 삶을 동경하였던 사람들이 무덤이 만ㅇ히 있다. 이들이 무덤에서는 중원에서의 삶을 표현한 그림들이 출토된다. 또한 다양한 크기의 각종 인종의 인형이 많이 출토 되었는데, 이는 생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표현하기 위하여 대량의 인형을 부장했던 중국 장례문화의 전통과 일치한다.



 
중국 고대신회에 나타나는 남녀신인 복희와 여와를 그린 것이다. 오른쪽에 복희는 왼손에 사각형을 그리는 도구인 구를 왼쪽의 여와은 오른손에 원을 그리는 도구인 규를 가지고 있다. 모두 천지창조를 위한 도구로 불려진다. 두 신의 머리 중앙에는 빨간 핵이 있는 둥근 태양을 배치하고, 아래쪽에는 두꺼비 머리가 있는 둥근 달을 그리고, 주위에는 각종의 별들이 그려져 있다. 시체나 관을 덮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것이다.

지혜의 미식은 혀이고, 혀의 미식은 언어이며, 사람의 미식은 얼굴이고, 눈은 얼굴의 미식이다.

무덤을 지키는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동물인 흙인형
악령 등으로부터 무덤을 지키기 위해 세웠던 짐승 모양의 신상으로, 흔히 진묘수라고 한다.

구리 안대
툴토당시 죽은 사람의 눈 위에 놓여있었다. 안대의 중앙 양쪽 눈 부분에 좁은 구멍들이 있어 바깥 물건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바람과 모래를 막는 역할도 가능하였다. 실제 이러한 눈가리개를 하면 시계가 좁아지고 어두어지기 때문에 선글라스로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채색토기 

배가 불룩하고, 바닥이 평평한 토기이다, 그릇 아랫부분에는 연꽃이 위를 향하고 있는 모습이, 윗부분에는 연꽃이 엎어져 있는 모습이 장식되어있다. 뚜껑은 진흙으로 만들어 구멍을 막았고, 꽃무늬를 찍어 장식하였다.

불교는 동쪽으로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는 간다라 지역을 거쳐 동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로 전파되었다. 서역 지방에 전파된 불교문화는 우선 서역남도 지역에서 불탑을 중심으로 하는 사원건축의 형태로 발달하였다. 이후 불교문화의 중심이 점차 서역북도로 옮겨가며 평지 시원건축과 더불어 석굴사원이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에서는 실크로드의 각지에서 석굴사원으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불교미술이 조영되기 시작하여 6~7세기경에는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쿠차의 키질 석굴,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 둔황의 천불동 등은 그 대표적이 예이다. 중앙아시아의 불교문화는 석굴사원의 형태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 장엄된 벽화 및 조각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불상 틀 

앉아 있는 부처의 상을 찍기 위한 석고 틀이다. 호탄지역에서 불교를 주제로 한 석고 틀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파미르에서 석고가 많이 생산된 것과 관게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래상 벽화들

카라 서원(복원 모형) 

중앙의 사각형 대좌에는 돔 지붕의 불탑이 놓여있는데 그 위에 나무 기둥이 통과되어 있다. 탑의 기단부는 정사각형으로 사면에 각각 좌불이 놓여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방의 벽면에는 위 두 줄에서 두 줄은 좌불 아래의 한 줄에 입불 그려져 있다. 이 주변으로 외곽으로 불전의 벽을 둘러싼 길이 있다.

여래좌상 

눈과 백호에 베푼 은상감, 활 모양의 눈썹과 눈동자에 검은 물질을 넣는 기법, 왼손 5지와 오른쪽 제1지를 붙이는 형태의 설법인 연화좌와 수미좌를 상하로 구성한 대좌등이 카시미르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왕오천축국전 

둔황과 왕오천축국전 

둔황은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서역북도와 사막 남쪽의 서역남도가 동쪽에서 서로 만나는 곳이다. 둔황은 중국의 서쪽 영토가 끝나고, 서역이 시작하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 오래 전부터 크게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한 번영의 상징이 바로 명사산 기슭의 둔황 천불동이다. 둔황을 오가던 대상들은 여행의 안전을 빌기 위하여 이들 석굴을 조성하고 각종 불화를 그려 놓았다. 1900년 둔황 천불동 17호굴에서 발견된 둔황 문서는 둔황을 비롯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등 중앙아시아의 탐험가들이 둔황 문서를 다투어 자신의 나라로 가져갔다. ‘다섯 천축국을 여행한 기록’ 이라는 의미를 가진[왕오천축국전] 역시 펠리오가 가져간 둔황 문서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







청동마차행렬

뿔이 하나 달인 동물 유니콘 

청동으로 만든 해치이다. 머리에 뿔이 하나 달려 ‘독각수’ 라고도 불린다. 해치는 좋고 나쁨을 판단할 때 성이 나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나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치에 맞지 않는 편을 뿔로 가리키거나 물어 버리기도 했으며, 심지어 뿔로 찍어 그 자리에서 죽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해치는 공명정대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막고굴 17 동굴 모형



막고굴 275 동굴(복제동굴 모형)


보살입상
여래좌상

왕오천축국전 원본-한국에 최초로 공개 되었다

4부 -길은 동쪽으로 이어진다-

길은 동쪽으로 이어진다. 

둔황에서 동쪽으로 란저우를 거쳐 장안에 이른다. 둔황에서 란저우까지는 남쪽으로 치렌산맥, 북쪽으로 고비사막이 1,000km 정도 펼쳐져 있는데, 이를 하서회랑이라고 부른다. 한나라 이후 이 지역은 중국의 서쪽 변방을 이루고 있었지만, 중국이 쇠약해졌을 때는 독립적인 소왕국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하서회랑 동남쪽의 닝샤 역시 오래전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하지만 흉로 계통의 유목민 전통도 갈아하게 남아 있었다. 중국 문화화 흉로 계통의 유목민 문화가 결합되어 이 지역은 실크로드 상의 독특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서역에서 전래된 각종 문물은 장안에 집결되어 서역으로 향하는 중국문물과 교환 되었다. 하지만 장안이 실크로드의 종착점은 아니었다. 장안에 모였던 각종 문물은 보다 동쪽으로 신라의 경주에까지 이르렀다.



무덤에 있던 무사 흙인형

금관장식



로마 금화
유리잔은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 된 유리잔과 똑같은 모습이다.

포도넝쿨의 암막새-경주에서 발굴된 포도넝쿨 암막새.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풍요와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포도무늬는 넝쿨무늬(당초문)과 함께 어우러져 통일신라의 암막새를 장식하다. 우리나라에서 포도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는데, 포도무늬는 서아시아를 통해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크로드와 경주의 관계는?

서역에서 전래된 각종 문물은 장안에 집결되어, 서역으로 향하는 중국 문물과 교환되었다. 하지만 장안이 실크로드의 종착점은 아니었다. 장안에 모였던 각종 문물은 보다 동쪽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중국을 통해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직접 서역과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신라 고분에 나타나는 유리제품과 황금 제품 등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역의 문물이 경주에 많이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특히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는 약 20여 점 이상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로만 글라스계통으로 보인다. 경주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상이나 조각에서는 신라인의 눈에 비추어진 서역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관람시간-
,목,금요일 오전 9시 ~ 오후 6시
수, 토요일 오전 9시 ~ 오후 9시
일요일,공휴일 오전 9시 ~ 오후 7시
매주 월요일, 2011년 1월 1일 휴관
2010.12.18(토) ~ 2011.04.03(일)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museum.go.kr/

원본주소-http://homihomi.tistory.com/532

한국 최초로 공개되는 왕오천축국전을 꼭 관람해보세요~ 추천 꾹!!

글쓴날 : [11-01-25 00:45] 호미숙기자[homihomi1@naver.com]
호미숙 기자의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