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혜초의 왕오천축국전-실크로드와 둔황(둘)

 
카슈가르, 쿠차, 투루판, 누란, 둔황, 장안

실크로드와 둔황

실크로드는 고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문명 교류의 젖줄이었다. 문명의 발생 이후 동서 문명의 교류는 중앙아시아 일대의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오아시스로, 유라이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지나는 초원의 길, 유라시아대륙 남쪽 바다를 이용한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를 흔히 실크로드 간선도로라고 한다.

실크로드라는 개념은 19세기말 독일의 지리학자 리흐트호펜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비단이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파미르 고원 서쪽 지역과 서북 인도로 수출되었던 점에 주목하여 이를 실크로드(비단길)라고 이름 지었다. 이후 실크로드의 개념은 시리아. 로마로까지 점차 확장되었다. 이 길은 주로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오아시스로에 대항하였고. 3대 간선도로 가운데서도 가장 중추적인 역학을 담담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파미르 고원 동쪽 지역의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 문명교류의 생생한 현장을 소개한다. 이 길은 현재의 신장위구르자치구에 해당하는 ‘서역’에서 둔황을 거쳐 동방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던 장안에 이른 후 다시 동쪽으로 신라의 경주까지 이어진다. 또한 8세기 초 신라의 혜초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실제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실크로드를 따라갔던 그의 여정은 현재의 우리와 실크로드를 가깝게 이어준다.

1부 -실크로드의 도시들


삼채낙타

중국 당나라 때 만들어진 당삼채 낙타이다. 등에 봉이 하나 있는 낙타는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 반도에서 주로 서식하고. 봉이 두 개 있는 낙타는 고비사막, 몽골.알타이 지역 등 아시아 내륙에 분포하였다. 낙타는 사막을 건너는 실크로드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관람하는 사람들

[다시 소륵으로부터 동쪽으로 할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이곳은 곧 안서대호도부로서 중국 군대가 대규모로 모여 있는 곳이다.
구자국에는 절도 많고 중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왕오천축국전 중에서-

 경교석비

기독교의 한 종파였던 경교와 관련된 비석으로 위에 검은색 십자가 도안이 새겨져있다. 기독교도의 무덤 앞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교는 7세기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유입되었다.


공양인 두상

공양인은 부처나 보살에 향기로운 꽃과 등불, 음식, 의복 등을 시주하는 살마을 말한다, 머리에 복잡한 형태의 터번을 말아 넣고 풍부한 수엽을 기른 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두상에 나타난 수염과, 눈썹, 코 부분과 전체 얼굴 형태가 입체감이 강하여 중원 한족과는 다르다.


실크로드는 문명교류의 길이다.
그 길을 통해 문명과 문물이 전해지고.
발전하고, 사라져갔다.

국제상인, 소그드인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 아무다리아. 시르다리아 두 개의 강 사이에 위치하는 오아시스 도시에 살았다. 이들은 실크로드의 요충자리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곳곳에 집단 거류지를 건설하고 실크로드의 동서를 잇는 육상의 중계무역을 주도하였다. 소그드인은 중국의 수도 장안을 비롯하여 무역의 주요 대상자인 투루판, 하미, 둔황 등지에도 집단 거주하였다. 이란계 민족으로 알려져 있는 소그드인의 종교는 공대 이란 문화를 대표하는 조로아스터교였다.

불을 숭배하는 종교로 알려져 있는 조로아스터교는 소그드 상인의 활동을 따라 사방으로 전파 되었다.동서 교역을 주도하였던 소그드인의 활약으로 소그드 문자 역시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소그드문자는 이후 위구르. 몽골문자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목민들의 생활 용품 도구들(털모자. 주머니, 나무 머리빗)

-서역남도-

서역남도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곤륜산맥 북쪽의 오아시스 도시를연결하는 길로 호탄, 케리야, 니야, 체르첸, 누란 등의 오아시스가 있다, 누란의 샤오허묘지에는 기원 전 2000년 전 이곳에서 전형적인 코카서스 백인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서역남도의 호탄 케리야, 이란 등에서 서역 지방에 전파된 초기 불교의 사원 건축에 많이 남아있다. 고대로부터 중국인이 선호했던 호탄의 옥은 이길을 통하여 중국으로 향하였고 중국의 비단 역시 초기에는 이 길을 통하여 서쪽으로 향했다.


2부 -실크로드의 삶과 문화-

비단은 서쪽으로

기원전 1세기경 비단을 처음 접한 로마인은 비단의 부드러운 감촉과 화려함에 매료 되었다. 중국의 비단은 로마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금과 똑같은 무게로 교환되었다. 비단의 직접 생산은 로마뿐만 아니라 비단 무역으로 생기는 이익을 얻고자 했던 실크로드 지역 모든 도시들의 공통된 욕구였다.

중국비단의 직조 기술은 서역을 통해 서쪽으로 페르시아에 전파되면서 커다란 변환을 겪었다. 중국의 전통 비단 직조기술은 한금이라고 하는 날실을 이용해서 무늬를 넣는 경금이엇다. 이에 반해 페르시아에서는 씨실을 이용해서 무늬를 넣는 위금을 발전시켰다. 페르시아의 직조 방식은 중국보다 화려하고 다양한 무늬의 직조가 가능한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위금 기법은 중국으로 전해졌고, 당금이라 불리는 중국식 위금으로 발전했다.



유목민의 전통

천산산맥 북쪽의 초원지대는 말을 타고 양과 염소 등의 가축을 먹일 풀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생활이 발달하였다. 유목생활은 가축과 함께 정처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 여름에는 서늘한 산 정상지역에서 지내며, 겨울에는 따뜻한 저지대로 이동하는 등 정기적으로 생활 거점을 바꾸는 것이었다.

유목민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그들이ㅡ 기본 자신인 가축에 의존한다. 농경을 주로 하는 민족과는 달리 육류를 기본적인 식량으로 한다. 의복 또한 주로 가축의 털이나 가죽으로 만들어 이동에 편리한 조립식 텐트(겔)에 거주한다. 유목민들에게 동물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정신력의 상징이었으므로, 이들은 뼈, 나무, 금속, 등으로 각종 동물의 형상을 조각하였다.

 날짐승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동제 고리

날개 달린 두 마리의 동물이 서로 마주 보고 엎드려 있는 둥근 동기 이다. 호랑이의 머리를하고. 귀는 위로 섰으며, 짧은 갈기를 가졌다. 한 쌍의 뿔은 뒤를 향해서 올라가 있고, 등 양측에 한 쌍의 날개가 달려있다. 원통형 안은 비어서 안쪽으로 열려있다. 종교의식에 사용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탄-가장 부흥했던 나라
호탄은 중국 바깥에서 최초로 비단을 생한한 곳이라 전해진다. 7세기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5세기 경 호탄의 국왕은 비단의 제조기술을 알기 위하여, 중국 황실과 혼인을 청했다. 국왕은 결혼할 공주에게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는 비단을 만들 수 없으니, 공주가 직접 만들어 입어야한다" 고 전하였다. 왕의 뜻을 알게 된 공주는 자신의 머리 장식에 뽕나무 종자와 누에고치를 숨기로 호탄으로 가지고 들어왔고, 호탄의 비단 직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제 납골기

진흙으로 만든 붉은 색 도기로, 발견 당시 안에 해골이 있었다. 관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지어로 ‘웃으아리’ 라고 한다. 웃으아리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소그드인의 일반적인 매장 방식이었다. 특히 소그드인들은 깔끔했으며 사체가 부패하며 흐르는 물까지도 따로 흐르도록 물길을 터 냈을 정도라 한다.

샤오허 묘지

샤오허 묘지 나무로 만든 사체. 행방을 모르는 사람들의 무덤을 만들 때 이런식으로 나무로 사람모형을 만들어 모든 수장품고 함께 넣었다한다.

해골을 넣는 주머니


4,000년 전의 기억-샤오허 묘지

2002년 타클라마칸 사막 동쪽, 누란의 옛 성터 서쪽에 4,000년 전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섬처럼 솟아 있는 언덕 위에 수백 개의 무덤들이 쌓여 있었다. 무덤 위에는 메마른 나무들이 촘ㅊ모하게 박혀 있었다. ‘누란의 미녀’라고 불리는 젊은 여인의 시신을 비롯해 이곳에 묻힌 사람들의 인종은 전형적인 코카서스 백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무덤 주인공들의 문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1,000 년 이상이 흐른 후 이 지역에는 기원전 2세기 중국의 역사책에서 서역 36개국의 하나로 ‘누란’이 나타나지만, 양자 간의 연관은 확인되지 않는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 이라는 의미를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은 사람이나 짐승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에게는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북쪽의 천산산맥과 남쪽의 곤륜산맥에서 흘러오는 물에 의지하여 사막에 오아시스 도시를 만들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글쓴날 : [11-01-25 00:28] 호미숙기자[homihomi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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