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 충재박물관


닭실마을에 있는 충재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처음엔 그저 전통마을에 하나쯤 있는 마을 전시관쯤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안에 들어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전시된 유물의 면면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3 분의 1 정도 돌았을 때 이미 나는 바로 조금 전에 가졌던 무지와 오만에 낯이 후끈거릴 정도였다. 충재 권벌선생이 어떤 분이신지, 그 선생이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남기신 유물과 그것들이 지금껏 전해 내려오는 정성으로 볼 때, 어떤 이유에서든 절대 낮춰볼 만한 분도, 낮춰볼 만한 안동 권씨 집안도, 낮춰볼 만한 닭실마을도 아니었다. 충재 권벌선생이 남기시고 충재박물관이 소장 중인 유물 중에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있는 것만 해도 아래와 같다.
 
보물 제 261호, 충재일기(沖齋日記)
보물 제 262호, 근사록(近思錄)
보물 제 896호, 충재권벌종손가소장전적. 소장하고 있는 고서적을 뜻한다.
보물 제 901호, 충재권벌종손가소장고문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를 뜻한다.
보물 제 902호, 충재권벌종손가소장유묵. 소장하고 있는 고인의 필적을 뜻한다.
 
충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유서 몇 장을 구경했다. 사람이 죽을 때 남기는 유서 말고 우리가 보통 “니 유세부리나?” 할 때의 그 유서다. 유서의 정확한 뜻은 관찰사, 절도사, 방어사들이 임지로 부임할 때 임금이 내리던 명령서다. 징병할 수 있는 밀부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이 유서를 가진 사람에게 누구라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던 모양인데, 그래서 이 때 생겨난 단어가 바로 ‘유세부리다, 유세떨다’다. 이건 물론 안동 권씨 장손께서 친절히 설명해주신 내용이다. 충재박물관에서 구경한 유서는 특히 충재 권벌선생이 중종 33 년(1538)에 경상감사로 부임할 때 받은 특권에 관한 것이었다.
 
유지라는 것도 있었다. 유지란 승정원의 담당 승지를 통해 발급되는 왕의 명령서를 말한다. 충재박물관에서 구경한 유지는 특히 충재 권벌선생이 중종 34년(1539)에 개종계주청사의 임무를 수행할 때 받은 유지였다.
 
분재기라는 것도 있었다. 분재기란 [상속 시 자녀에게 재산이 어떻게 나뉘어졌는지에 관한 문서]다.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분재기는 충재 권벌선생의 모친인 윤씨가 친정인 해남 윤씨 집안으로부터 받은 유산의 내역을 정리해둔 문서다. 해남 윤씨 하면 고산 윤선도로 유명한 집안이다. 그 때 해남에 갔을 때……고산 윤선도의 어디더라…… 해남 윤씨의 종가 같은 그런 곳이었는데…… 여하튼 거기서 이 분재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분재기를 적던 당시만 해도 출가한 딸에게도 상속이 균등하게 이뤄졌는데, 이 후 시집간 쪽 집안이 이 재산을 기반으로 더 흥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자 점점 아들에게만 상속을 하게 됐다고 한다. 충재 권벌선생의 집안 또한 이 모친 윤씨가 가져온 재산이 기반이 되어 이후 크게 흥했다고 했는데, 해남 윤씨 집안으로부터 들은 말이라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왕에게 올리는 상소문에 동조자의 명단을 쭉 적고 그 밑에다 각자 수결한 문서도 전시되어있었다. 수결이란 조선시대 사람들의 사인(Sign)을 뜻한다. 상소문의 끝장에 정말 당시 선비들이 한 사인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글을 적다 보면 이 ‘사인’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만한 단어를 몰라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제부터 이 ‘수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겠다.
 
충재 권벌선생이 명나라에 갔다가 명나라 태조로부터 받은 태조의 친필 ‘忠(충)’ 자 족자도 전시되어있었다. 중국 것이라서 그런지 역시 글자도 컸다.
 

 

글쓴날 : [10-12-23 19:06] 이한설기자[dondo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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