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 닭실마을

 

삼계교에서 시작된 석천계곡 유람은 중간에 석천정사를 찍고 닭실마을로 이어졌다. 대충 거리가 얼마쯤 되려나…… 삼계교에서 석천정사까지 한 40 분, 다시 석천정사에서 닭실마을까지 한 30 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야들이 기어서 갔나? 굼벵이가 가도 그거보다 빠르겠다. ’
 
누가 이런 의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구경할 것 다 하고, 사진 찍을 것 다 찍고, 눈싸움 할 것 다 하면서 쉬엄쉬엄 가면 이 정도 걸린다.
 
삼계교에서 석천정사까지는 지난 번에 이야기했으니까 넘어가기로 하고, 우리는 석천정사를 지나 닭실마을로 향했다. 계곡을 거슬러올라가는 산책로는 물가에 내려서지 않고 한걸음 떨어져 널찍이 뻗어있었다.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너른 길이었다. 지금 석천계곡을 그리다 보니 언뜻 드는 생각이 하나 있는데, 석천계곡은 마치 우리의 내장 같다. 위로는 닭실마을에서 석천정사까지 큰길이 놓여있어 위내시경을 할 수 있고, 아래로는 삼계교에서 징검다리까지 도로가 놓여있어 대장내시경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장 속 쓸개쯤에 석천정사가 있다.
 
걷는 동안 올해 처음으로 눈다운 눈을 밟아봤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몇 번이고 눈을 뭉쳐 사람들에게 던졌는데,
 
“에잇! 가시장미, 받아라!”
“에잇! 콜라, 받아라!”
“에잇! 은영이…….”
 
은영이에게는 차마 던지지 못했다. 잘못했다간 여행이고 뭐고 작살이 나기 때문이다. 은영이를 제외하고는 닥치는 대로 던져서 나의 눈뭉치가 피융~하고 날아가 퍽~하고 등짝에 박혔다. 내가 던진 이 눈뭉치들이 알알이 퍼져 추억이 되고, 사랑이 되고, 나를 포함한 모두의 가슴에 이 순간이 웃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세월이 흘러 모두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죽고, 홀로 남겨지더라도, 오늘 이 눈뭉치로 기억되는 하루만큼은 석천계곡과 함께 영원히 즐겁게 남았으면 좋겠다. 이런 나의 깊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영이는 만날천날 나를 혼낸다. 나는 은영이의 군소리 중에 이 말이 가장 듣기 싫다.
 
“선배, 몇 살?”
 
그런데 솔직히 아무리 듣기 싫은 군소리라도 침묵보다 훨씬 낫다, 헤헤헤~~~
 
계곡다운 풍경이 끝나고 개천다운 풍경이 시작될 때쯤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왼쪽에서 흘러드는 물은 동막천이고, 오른쪽에서 흘러드는 물은 창평천이다. 이 두 물이 한데 모여 석천정사로 흘러들고, 삼계교로 흘러들고, 내성천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닭실마을은 동막천과 창평천 사이에 놓여있다. 그렇다고 물길 사이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건 아니고, 봉곳이 솟은 나지막한 산 남쪽 기슭에 기대어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길은 창평천을 따라 조금 더 나아간 뒤 다리를 건너 닭실마을로 들어갔다.
 
다소 황량해 보이는 들녘풍경에 괜히 미안했던지 전에 한번 와봤던 분이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여기는 누렇게 벼가 익을 때쯤 오면 정말 좋아요.”
 
나는 아무 소리 안 했는데…… 아마 그 분은 내심 나에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으리라!
 
‘나는 닭실마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이렇게 좋은 마을을 이렇게 안 좋은 계절에 첫발을 내디딤으로써 갖게 될지 모를 사유의 빈곤을 경계합니다. 이 곳은 당신이 보고 있는 것 이상으로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는 다 익은 벼들이 마을 앞 들녘에서 군무를 췄고, 불과 며칠 후면 이 일대가 설국으로 바뀝니다. 부디 시선으로는 닭실마을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만을 보시고, 실제 마을을 바라보는 건 마음으로써 하소서. ’
 
닭실마을은 충재 권벌선생의 선조께서1380년쯤 개척하신 마을이다. 마을모양이 금계포란형이라‘달실마을’이라 불렸는데, 이것이 한글맞춤법에 의해 싹 정리되면서 ‘닭실마을’이 됐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나? 지명까지 모두 한글맞춤법에 맞춰야 한다면, 바뀌어야 할 마을이름, 산이름, 계곡이름, 섬이름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수억 된다. 만약 정 이런 식으로 한글맞춤법을 적용하고 싶다면 먼저 간판에 널려있는 ‘조은 XX’부터‘좋은 XX’로 바꿨으면 좋겠다. ‘마니커’도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다. 여담으로 내 고향 경상북도에서는‘닭’이 아니라‘달’이 맞다. 아니면 적어도‘달구’라고 해야 한다. 우리할머니께서는 병아리를 보고‘달구새끼’라고 하진 않으셨지만, 닭을 보고는“저 노무 달구새끼, 저 노무 달구새끼” 하셨다. ‘닭실마을’ 안내판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 이 곳은 유곡으로 ‘닭실’인데 흔히 ‘달실’로 불린다. ]
 
주객이 전도된 아쉬움은 남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도 배려해주니 마음이 좋다. 닭실마을의 행정구역상 공식명칭은 경상북도 봉화읍 유곡리다.
 
닭실마을은 안동 권씨 집성촌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을 안에 안동 권씨와 관련된 유물, 유적이 참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충재 권벌선생의 유품이 모셔져 있는 충재박물관이 있고, 권벌선생이 세우신 청암정이 있고, 안동 권씨 종가와 거기에 부속된 사당이 있다. 닭실마을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석천정사도 엄밀히 말하면 안동 권씨 집안의 유물, 유적이다. 이뿐이 아니다. 여기에 그 유명한 닭실마을의 전통한과가 보태지는데, 닭실마을의 전통한과가 지금껏 이렇게 명맥이 잘 유지되어온 이유가 바로 안동 권씨 집안의 뼈대 있는 제사상 덕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물, 유적을 기반으로 마을 전체가 고풍스럽게 가꿔져 있는 것 또한 닭실마을의 격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닭실마을에서 먼저 안동 권씨 종가를 둘러보았다. 안마당까지 들어갈 수 없어 많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안동 권씨가 누린 옛 영화의 정점이기에 알게 모르게 그 정기가 느껴져서 한 번 볼 것을 두 번 보고, 세 번 봤다. 종가 바로 옆에 사당도 마련돼있었다. 
  

 

종가를 지나 청암정에 올랐다. 청암정은 충재 권벌선생이1526년(중종20년)에 세운 정자다. 집 근처 거북이 모양의 커다란 바위를 빙 둘러가며 물길을 내고, 그 위에 널찍한 돌다리를 하나 놓음으로써 정자로 드나드는 입구로 삼았다. 우리와 함께 닭실마을을 주유했던 안동 권씨 종손께서 청암정에 걸려있는 현판과 시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현판은 알고 있었지만 시판에 대해서는 이 날 처음 들었다. 시판이란 바로 이런 거다.
 
선선한 가을날 아침, 달실마을 닭들의 홰치는 소리에 충재가 잠에서 깼다. 충재는 눈을 뜸과 동시에 코를 킁킁거렸다. 술내를 찾는 것이었다. 석 달 열흘 동안 술독에 고이 모셔져 있던 술이 그 숙성을 다하면서 닭실마을 천지에 술내를 풍겼고, 밤낮 계속되는 이 술내에 충재 자신뿐만 아니라 식구들, 하인들, 심지어 근처 닭실마을 이웃들까지 모두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글을 읽어도 먹향 대신 술내가 풍겼고, 비위가 약한 아낙 몇은 술내에 취해 비틀거렸고, 밭을 가는 촌로의 눈엔 흙이 온통 술지게미 같았다.
 
‘오늘은 꼭 저 놈의 술을 모두 마시고 말리. ’
 
충재는 다짐을 하며 큰머슴을 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예, 쇤네 와있습니다요.”
“아침에 안동 장씨 종가에 급히 전할 전갈이 있느니라. 즉시 떠날 채비를 하거라.”
“예.”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하지만 충재는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큰머슴을 불렀고, 큰머슴 또한 늘 그랬던 것처럼 마당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자박자박 멀어져 가는 큰머슴의 발자국소리와 함께 충재는 머리맡에 있는 앉은뱅이 책상을 당겨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전날 쓰다만 편지를 계속해서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단순히 안부나 물으려던 편지는 결국 술내 섞인 묵향에 술자리 초대글이 되어버렸다.
 
“…… 그러니까 청암정에 초록이 최고조에 달했단 말이지. 마침 담가놓은 술도 잘 익고 했으니 우리집에서 한 잔 하세나. 술을 마시기 위해 자네를 청하는 건 아닐세. 나는 그저 청암정에서 옛 친구들과 함께 시를 지으며 하루를 보냈으면 하네. 의성 김씨, 경주 이씨, 경주 김씨도 불렀다네. 꼭 와주게나. 오시에 청암정이네. 내 기다림세. 충재가.”
 
큰머슴이 떠날 채비를 하고 돌아와 충재의 편지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십 리를 한달음에 달려가 안동 장씨 종가에 도착했다. 안동 장씨 종가를 지키고 있는 경당의 친척이 큰머슴을 반겼다.
 
“그래, 충재께서는 무탈하신가?”
“예, 그러하옵니다.”
“어쩐 일로 이리 이른 시각에 이까지 자네가 왔나?”
“충재나으리께서 나으리께 이 편지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큰머슴은 경당의 친척에게 충재의 편지를 건넸다. 경당의 친척은 편지를 받으며 큰머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채에 가서 쉬고 있거라. 내 곧 답을 하마.”
“예, 알겠습니다, 나으리.”
 
큰머슴이 사랑채로 물러갔다. 경당의 친척은 안방으로 들어가 충재의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곧 큰머슴을 불러 오시에 청암정으로 가겠다고 일렀다. 큰머슴이 닭실마을로 돌아간 후, 경당의 친척은 안방으로 들어가 고민 아닌 고민에 빠졌다.
 
‘음…… 요란한 선물을 가지고 가는 건 선비의 도리가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집에 있는 잘 익은 술을 가지고 가는 것도 충재의 호의를 무시하는 처사가 될 터이고, 음…… 안 되겠다. 아무래도 시를 한 수 지어가야겠어. ’
 
경당의 친척은 붓을 들고 시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십 번을 고쳐 적으며 버려진 한지가 방안에 그득하게 쌓였다. 안동 장씨 종가의 ‘ㅁ’ 자 안마당 깊숙이 햇살이 비칠 때쯤 이윽고 시 한 수가 완성됐다. 시간은 이미 여러 식경을 지나있었다.
 
청이라…… 청청독야 한 자네도 청와대로부터 청을 받았겠지, 청재? 아니, 충재?
암이라…… 암만해도 시국이 암울하니 암암리에 후학이나 기르세. ’
정이라…… 정치에 정말로 정이 없었으면 정말 좋겠네, 정재. 아니, 충재.
 
종지부를 찍는 경당의 친척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시 짓기를 마친 경당의 친척은 의관을 챙겨 입은 후, 시를 적은 한지를 고이 접어 소맷자락에 넣었다. 오시까지 아직 꽤 긴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가는 길에 전답을 둘러볼 요량이었다.
 
“어머니, 닭실마을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경당의 친척은 어머니께 출필곡을 하고 집을 나섰다.
 
먼발치에서 경당의 친척이 오고 있음을 발견한 충재는 청암정을 나와 돌다리 앞에 섰다. 돌다리 앞까지 나와있는 충재를 보고 경당의 친척은 반가운 마음에 허둥허둥 자신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양반의 체통에 흠집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둘은 청암정 돌다리에서 만났다.
 
“잘 지냈는가, 충재? 그 동안 무탈하고?”
“그래, 나는 별일 없었네. 자네는?”
“나도 그냥 저냥 살고 있지.”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얼른 올라가세나. 다들 와있네.”
 
충재는 경당의 친척을 앞장세우고 돌다리를 건너 청암정으로 향했다. 물에 비친 두 선비의 모습은 마치 곧 비상하려는 학과 같았다. 경당의 친척은 돌다리를 건너며 청암정을 올려다보았다. 3명의 벗이 이미 와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충재 권벌과 경당의 친척과 의성 김씨와 경주 이씨와 경주 김씨 이렇게 다섯은 안동, 봉화 일대에서 아주 유명한 막역지간이었다. 다섯은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청암정에서의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선비의 교류라 번잡함이 일체 없었다. 그저 술이 한 순배 돌고 나면 시가 한 수 읊어지고, 시가 한 수 읊어지고 나면 시구에 따라 몇 순배의 술이 돌았다. 석천계곡에서 불어오는 초가을의 청아한 바람이 청암정을 지나 달실마을로 흘러갔다.
 
술자리가 파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간 후, 불과하게 취한 충재는 친구들이 지어온 시와 청암정에서 즉석에서 지은 시를 되뇌며 한 수 한 수 한지에 받아 적었다. 모두 받아 적었다 싶을 때 그것들을 다시 한 수 한 수 아껴 읽으며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 한 수를 골랐다. 이렇게 해서 고른 시가 바로 경당의 친척이 적어온 시였다. 충재는 큰머슴을 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소인 와있사옵니다.”
“너는 공방에 가서 이 시에 맞는 시판을 짜오너라.”
 
이로써 청암정에 시판이 하나 더 추가됐다.
 
청암정 누마루 바로 옆에 방처럼 생겼으되 방은 아니고, 그렇다고 누마루라 하기엔 경계가 너무 분명한 공간이 하나 있었다. 안동 권씨 종손으로부터 설명을 들으니, 그 곳에 원래 온돌이 깔려있었는데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마다 이상한 기운이 퍼져 어쩔 수 없이 온돌을 걷어내고 마루를 깔았다고 했다. 청암정에서 내려와 바로 옆으로 나있는 일각문을 통과하니 충재박물관이었다. 충재박물관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해야겠다. 


 

글쓴날 : [10-12-23 19:02] 이한설기자[dondo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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