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부자집, 최진립의병장에서 최준 독립유공자까지 | |
![]() 12대 300년간 만석군의 부자였던 교동 최씨댁을 찾았다. 1600년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 경주 최부자집은 부자의 철학이 있는 집으로 그 철학이
인터넷에 회자되어왔다. 나는 상당히 미화되어 세상에 뜬 줄 알았는데, 그 대문
옆에 독립유공자 표지판을 보고, 또 포스팅하면서 조사하는 가운데 으음..하는 마음이
들었다.
![]() '9대 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였던 분, 최준선생이 독립운동 지원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루었다...' 이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첫손 꼽히는 집안이라 했던가 보다.
1950년에는 전 재산을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하고 부자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벗어버리고 무대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어디 쉬운 일인가?
정말 그게 쉬운 일이냐구요...
![]() 12대 만석꾼을 했던 집 대문을 들어서 보았다. 미국서 온 의사들이 이집을 특별히 오고싶어 했다.
![]() 경주 최부자집은 최국선(崔國瑄: 1631~1682)으로부터 최준(崔埈: 1884~1970)에 이르는 약 300년 동안에 부를 누린 집안이다. 과객에게는 후했으나 집안 내부살림은 소박 검소했다고 한다.
![]()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다.
곳간 같은 건물 앞에 유명한 글들이 나무판에 새겨져 줄지어 있었다.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마라...과거마저 보지 않으면 양반들이 업신여길
테니 양반계급은 유지하되 지나친 권력을 경계한 말이다. 2,3,4,5은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뜻한다.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으라...
검소하며 자신을 평민처럼 낮추라는 뜻일 것이다.
![]() 성공하였을 때는 담담히,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 안채는 ㅁ 자 모양인데,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안채와 사랑채에
묵고 가는 과객이랄까 식객이 100 여명에 이르기도 했다고.
최부자집은 만석집안이었지만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백동 숟가락의 태극 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다고 한다.
![]() 안채에서 꺾어진 별채 미닫이 문을 열고 한 곱상한 할머니가 바깥을 보고 있다.
원래는 99간 집이었지만, 지금은 규모가 축소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최씨 친척들이 거주하고 있다.
![]() ![]() 줄지어 서서 사랑채 관람 중. 1970년대에 화재를 당해 주춧돌만 남았었다는
사랑채는 새로 지었다고 했다.
![]() 서당 같은 느낌을 주는 곳
![]() 뒷 툇마루에서 일행이 잠시 쉬었다. 부자는 부럽되, 고생은 두렵다는 종가 며느리도
있고, 건너 마을에 최진사댁에 딸이 셋있는데...의 최진사가 이집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얘기도 했다. 아무튼 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말라 라는 철학이
가장 묘미가 있었다. 삼촌의 의대동창이 이집 아들이어서, 이 집 다녀온 얘긴 어릴 때
들었었다.
![]() -사당
![]() 사랑채 뒤 후원 한쪽에 있는 석물
![]() 400년 세월을 지켜오느라 깨어져버리기도 한 유물들이 아직 제 자리를 못찾고
있었다.
![]() 누가 본 KBS에서 다룬 경주최부자집의 시초가 된 임란 때의 의병장 최진립장군
이야길 해 주었었다. 보통 부자였던 최진립은 임란이 끝나자 일할 사람도 많이
죽어 없고 땅도 쓸모없이 버려져 있을 때, 거저 버리다싶이 한 땅을 나오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가진 돈으로 땅을 사들일 뿐 아니라 일꾼을 사서 수로를
개척했다.
이앙법, 모내기로 적은 일손으로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어 마을이
살맛나게 되었다. 또한 일꾼들에게 성과급을 주었는데, 토지를 떼어주어 성과가
큰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도 하고, 공동경작지를 두어 일꾼들이 공동행사나 필요
한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하나의 일은 마름을 없애고 소작인과 직접 계약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때부터
최진립은 경주 최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진립은 70
노구를 이끌고, 의병장으로 나서서 남한산성 외곽에 서 장열히 전사했다고 한다.
최진립은 무관으로서 최고의 칭호를 받으며 경주 용산서원에 위패를 모셨다고
했다.
최진립 :(1568-1636)
△1568년 경주 출생 △1592년 임진왜란 때 아우 계종과 의병 일으킴 △1594년 무과 급제 △1607년 오위도총부도사 △1614년 함경도 경원도호부사 △1630 가선대부 공조참판 △1637년 자헌대부 병조판서 추증 △1651년 시호 정무(貞武: 청백하여 절개를 지킴을 貞이라 이르고, 적을 억누르고
모욕을 막음을 武라 이름), 청백리에 오름 △ 1700년 용산서원 배향
(엔사이버 백과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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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10-12-14 21:58] | 손금지기자[Liberum@hitel.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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