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어두컴컴한 방, 유리, 그리고 오래된 물건들. 웬지 모르게 퀘퀘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적막 속의 오래묵은 공기들이 무겁게 머리를 누르는듯 한 느낌도 든다. 지루한 시간들과 한산한 공간이 만들어내는 의기소침한 분위기,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물건들과, 이걸 봐서 뭘 하겠다는 건가 라는 회의감. 내게 박물관이란 그저 관심의 변두리에 머물며 눈에 띄면 한 번 즘 들어가보는, 그런 어두운 공간일 뿐이다.
아마도 학창시절 때 경험들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수백여 명의 인원이 한꺼번에 줄 서서 우르르 들어간 박물관은, 그저 줄 서서 한바퀴 돌고 나오는 곳일 뿐이었다. 대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슨 의미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유리관 속에 있는 골동품들은 첨단기기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 없었고, 유물마다 적혀있는 설명서들은 너무나 단순하고 건조했다.
전시된 유물보다는 박물관 건물 자체의 내부 시설이나 둘러보는 관람이었고, 역사의 의미를 음미하기보다는 그냥 하루 바깥으로 나왔다는 의미였을 뿐이었다. 결국 박물관은 재미없는 곳으로 낙인찍혔고, 한 번 가봤으면 다시는 안 가봐도 되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했고,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을테다.
그렇게 졸업과 함께 우리의 관심 밖으로 멀리 몰아내버린 박물관에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 변화의 조짐에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은 단연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쪽으로 이전을 하면서 새롭게 개장한 국립중앙박물관이 우리나라 박물관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대체 박물관이라는 곳이 어떻게 바뀌었고, 또 바뀌어가고 있는지,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님께 직접 들어보았다.
수요일 야간개장
수요일 저녁에 박물관을 찾아갔다. 요즘 국립중앙박물관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저녁6시부터 밤9시까지 야간개장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설전시관은 관람료도 받지 않았다.
입구부터 본관까지의 공간은 마치 공원처럼 꾸며져있었다. 딱히 박물관 관람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굳이 사람 많이 몰리는 공원에 가지 않아도, 특별히 할 일 없는 휴일날 나와 쉬기 좋을만 한 장소였다. 본관 건물로 가까이 다가가니, 각종 행사안내 현수막과 배너들이 마치 코엑스같은 전시장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님을 처음으로 대면 한 곳은 박물관 내부의 한식당이었다. 처음에 박물관 구내식당이라고 하길래, 허름한 구내매점에서 컵라면 먹는 장면을 떠올렸다. 아니면 기껏해야 식판에 밥 담아 먹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은 그런 식당이 아니었다. 번화가 한복판에나 있을듯 한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의 한식당이었다.
관장님은 이 식당의 전주비빔밥이 맛있다면서, 이미 식사를 시켜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름만 전주비빔밥인 것이 아니고, 실제로 전주에서 직접 가져온 재료들로 만드는 비빔밥이란다. 박물관에서 외부인사를 초청해서 대접할 일이 있을 때, 특히 외국인의 경우에 우리나라 음식을 맛보여 주고 싶은 생각에 이 식당을 애용하신다고. 실제로 이 식당의 전주비빔밥은 전주에서 먹었던 그 맛과 아주 흡사했다. 다만 가격이 약간 비싼 것이 흠이었지만.
큐레이터와의 대화
저녁식사를 마친 뒤, 최광식 관장님은 박물관 안으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큐레이터와의 대화' 200회를 맞이해서 관장님이 직접 큐레이터로 관람객 앞에 서는 날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06년부터 매주 수요일 야간개장 시간을 이용해서 '큐레이터와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박물관 큐레이터들이 나와서 관객들에게 전시품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질의응답을 하면서 전시품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행사이다.
모든 작품들을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니고, 주제별로 약 30분간 핵심 작품들만 설명해주는 방식이다. 전문가들의 상세한 설명으로 전시품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높은 편. 매주 주제들이 바뀌므로 매번 방문해도 늘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주제별로 신청자 50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데, 상설전시관 1층 안내데스크에서 선착순으로 접수한다.
평일 저녁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나와서 선착순 접수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긴 했지만, 비교적 연령대도 다양한 편. 내가 무관심한 사이에 박물관은 이렇게 매니아 층을 확보해가고 있었구나 싶었다.
이날, 200회 기념으로 마련된 최광식 관장님의 '큐레이터와의 대화' 주제는 '선사와 고대의 기록문화'였다. 암각화와 벽화, 비문 등에 새겨진 문양을 중점으로 설명했다. 조용히 가서 전시물만 구경했다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벽화였지만,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니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큐레이터와 함께하면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지는 직접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의 '문화행사-교육일정' 메뉴에 들어가면, 언제 어떤 내용들이 설명되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님과의 대화
'큐레이터와의 대화'를 마치고, 관장님은 우리를 박물관의 또 다른 어떤 곳으로 이끌고 가셨다. 워낙 넓은 곳이라 갈 곳도 많았지만, 이번에 데리고 간 곳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곳이었다. 박물관 안에 호프집이라니! 물론 술집이라기보다는 카페에 가까웠는데, 이곳의 독일식 생맥주가 맛있다며 또 자랑하시며 맥주를 한잔씩 권하셨다.
맥주로 잠시 목을 축이고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됐는데,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박물관에 대한 기본적인 개요부터 설명해 주셨다.
A. 박물관은 과거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국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곳이며, 문화 컨텐츠의 보고이다. 박물관에 있는 많은 문화 컨텐츠들을 활용해야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물관을 한 번만 가면 되는 곳으로 알고 있다.
학생들의 단체방문이 많아서 우리 박물관의 방문객 수가 아시아 1위이긴 한데, 외국인들이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 참 안타깝다. 그건 우리나라 국민들부터가 박물관은 오래되고, 박제되고, 타율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지금의 박물관은 옛날의 그 박물관과는 많이 달라졌다. 각종 문화행사들도 있고, 기획전, 특별전 등으로 늘 새로운 모습을 보이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게다가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진정한 소통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극장이나 놀이공원에서는 별로 대화가 없지 않은가. 유물이나 작품을 감상하면서 설명을 듣거나, 서로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소통 아닌가. 그러니까 외국처럼 우리도, 박물관이 부모와 함께 자주 찾아가는 곳으로 인식되어, 소통의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했으면 좋겠다.
Q. 자주 찾아가는 박물관이 되기 위해서 국립중앙박물관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A. 특별전과 테마전 등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애쓰고 있다. 지금 진행중인 특별전시 '세계문명전, 그리스의 신과 인간'같은 경우, 영국박물관에서 빌려온 전시품들이다. 괜히 돈 들여서 영국 갈 필요 없이, 우리 박물관에서 똑같은 전시품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의 고대 문화'라는 주제의 전시도 있는데, 이건 우즈베키스탄 쪽에서 임대 해 온 것들을 전시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고대 문물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기획전, 특별전들을 통해서 항상 새롭게 변하는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Q. 듣기로는 박물관에 공개하지 않은 품목들이 많다고 하던데 사실인지.
A. 관람실에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작품의 상태나 주제에 따라서 공개를 하거나, 못 하는 상황도 있다. 예를들어 그림의 경우는 6주 이상 전시하지 않는다. 빛에 의해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박물관의 경우, 전시장에 내놓은 전시품은 약 1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수장고에 보관하는데, 상태와 공간, 시기와 주제에 맞게 꺼내오고 갖다놓고 하는 방식으로 전시품이 바뀐다. 단순하게 계산해도, 우리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다 보려면 최소한 열 번은 방문해야 된다. 대체로 박물관을 한 번 가보고는 다봤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Q. 우리나라 유적들은 외국에 비해 좀 초라한 것 같은데, 기분탓일까.
A. 시대마다 지역마다 트랜드가 달랐을 뿐이다. 통일신라시대 때는 조각이 발달했고, 고려 때는 불화, 조선 때는 초상화가 발달했던 것처럼, 아이템이 달랐고 트랜드가 있었다. 단순히 비교하는 것 보다는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단순히 비교하더라도 우리 고대 목걸이 같은 경우는 그리스 것보다 훨씬 섬세하다. 지금도 복제품을 제대로 만들수 없을 정도다. 잘 몰라서 그렇지 우리 유물들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수준이다.
Q. 우리나라 역사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교과서 왜곡 등으로 위협받고 있는데, 그 대책은?
A. 몇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 어느 중국 역사학자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 박물관에는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 역사실도 따로 없는데, 그걸 너희 역사라 말하는 게 웃기다'. 실제로 한국 박물관 중에는 고조선 실이 따로 있는 곳이 없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고조선, 부여, 삼한, 발해 등을 총망라하여 관람실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를거다. 논란이 있을 때는 반짝하고 여러 말들이 나오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평소에 박물관 등을 찾아서 우리 문화와 역사를 틈틈이 배우고 익혀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박물관은 국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곳이다. 과거와 현재를 비추는 우리의 거울이고, 다양한 문화유산들을 통한 문화 컨텐츠의 보고이다. 우리 박물관에서는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특별전을 여니까, 여러분들도 발 맞추어 관심을 좀 가져 주셨으면 고맙겠다.
이미 새로운 모습의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과 우리 문화에 대한 내용이 화제가 되자, 최광식 관장님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말을 쏟아냈다. 내용이 많았던 만큼 인터뷰 내용으로 완전히 정리하지 못 한 부분도 많았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이런 말씀이었다.
"다른 나라를 가서 그 나라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딱 네 군데만 가면 된다. '중앙 박물관, 민속 박물관, 고급 백화점, 재래시장'이다. 중앙박물관은 그 나라의 옛 고위층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고, 민속 박물관은 옛 서민들 생활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급 백화점은 현재 그 나라의 상류층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재래시장은 서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네 군데만 돌면 그 나라를 대충 다 알 수 있다."
이야기 나누는 내내 박물관은 한 나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곳이라는 것을 강조하셨고, 그 정체성을 확립하기위해 국민들이 자주 찾을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거듭하셨다. 그리고 급기야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의 초대권도 나누어 주셨다.
모임이 끝나고 나서도 가는 길을 배웅해주며, 박물관 본관 앞쪽의 정자를 꼭 보고 가야한다고 이끄셨다. 서까래 하나하나를 도자기처럼 구워서 만든 것으로, 백제시대에 있었다는 문헌기록을 토대로 만들어 본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시도이고, 현재까지는 유일한 것이라고. 낮에 오면 더욱 반짝반짝 빛나서 예쁘다며 이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자며 먼저 제안을 하셨다.
두시간 남짓 나눈 이야기들과, 하나라도 더 소개하고 보여주려는 그 모습에 '열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박물관과 우리 문화유산을 정말 사랑하시는 분, 국립중앙박물관은 지금 그런 분이 이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앞으로 계획된 할 일들도 참 많다.
매달 새로운 특별전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할 것이고, 수시로 열리는 특별전으로 전세계의 문화유산들도 보여주려 한다. 매주 수요일에는 야간개장과 큐레이터와의 대화를 진행할 것이고, 박물관 내부도 계속 다양한 내용들로 채워넣을 예정이다. 또한 IT 기술을 도입해서, 휴대폰을 갖다 대면 설명이 나오게 하고,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영상이 나오는 등의 기술들도 현재 구축중에 있다 한다.
우리가 오래된 옛 기억만 가지고 외면하고 있던 사이에, 박물관은 참으로 많이 변했고 또 변해가고 있다. 이제 박물관도 극장이나 놀이공원처럼 수시로 찾아갈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할 날이 머지 않았다. 아니 이미 그렇게 꾸며져 있는데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장 지금이라도 굳이 유물 구경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조용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도 충분히 이용할만 했다.
그러니 마침 이 글을 본 김에, 이번 주말이라도 오랜만에 박물관을 한 번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아마 오랫동안 박물관을 찾아가본 적 없는 사람들은 분명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에 놀라움을 느낄테다. 참, 최광식 관장님 말씀에 따르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은, 완전히 다 구경하는 데 약 11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참고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