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책 읽는 뇌 - <매리언 울프>

 

나는 내가 이렇게 머리가 좋은 놈인 줄 몰랐다. 고등학교 때는 1 등급이 나와도 나만 1 등급이 아니라 상위 1.5% 가 1 등급이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대학교 때는 4 년 동안 공납금보다 많은 장학금을 받았지만 이것 또한 나만 받은 게 아니기에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하지만 무협지의 강호 같은 사회,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밀림 같은 사회, 법과 주먹과 인간미와 꽁수가 정확히 1 : 1 : 1 : 1 로 공존하는 혼돈 속 사회에서 한 해 두 해 살아가다 보니 이젠 알겠다, 난 정말 난 놈이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머리 나쁘게 사는지 모르겠다. 어떤 문제를 푸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거야 그렇다 쳐도 영 엉뚱한 곳에서 헤매면서 자기가 헤매는지도 모르고 있는 건 차마 눈뜨고 못 보겠다. 참자…… 참자…… 참을 인(忍) 자 세 번이면 신선도 된다는데 참자! 지금 당장 내가 갖고 있는 이 완벽한 사상과 지식과 지혜와 경험을 어린아이 가르치듯 세상에다 전파하고 싶지만 그냥 참고 있는 걸 두고 뭇사람들이 ‘겸손’이라고 부른다지? 이런 ‘겸손’이 미덕에 속한다니 정말 할 말이 없다. 다들 좀 평범하게 머리 좋게 살면 안 되나?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나 같은 사람에게서 배우면 얼마나 좋아? 내가 잘 가르쳐주고, 잘 쓰다듬어주고, 잘 타일러줄 건데…….

 

이같이 천재인 나에게도 풀리지 않는 숙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우리 역마살은 몇 살 때부터 그렇게 머리가 좋았나?”에 대한 해답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오래된 아주 어릴 적부터 천재였기에 유전자를 들먹여야겠지만, 그리고 우리 부모님의 성정을 볼 때 유전자 기인설이 일말 타당한 것 같지만, 100% 유전자 때문만은 아닌 게 확실하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2 학년 2 학기 때던가, 3 학년 1 학기 때던가 학기말 성적표가 나왔는데 당연히 또 1 등이었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성적표를 그냥 책상 위에다 던져뒀었는데, 나중에 엄마가 그걸 봤나 보다. 엄마가 내게 말했다.

 

“역마살아, 나도 이런 성적은 받아본 적이 없단다. 잘 했구나, 내 아들.”

 

뭐야? 그러면 내 머리가 유전자가 아니란 말이네? 하긴 내가 다닌 대학교가 엄마가 다닌 대학교나 아빠가 다닌 대학교보다 훨씬 좋은 대학교고, 게다가 거기서도 전면장학금을 받고 다녔으니 유전자일 리 없다. 그러면 뭘까? 내가 나 스스로의 힘으로 똑똑함을 넘어서 천재의 반열에 들어선 건 확실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기제가 작동해서 머리가 이처럼 활화산같이 깨치게 됐는지 모르겠다.

 

지금껏 1 분 안에 못 푼 문제가 없었는데 이 문제만큼은 사회생활 13 년 동안 13 개의 지층이 켜켜이 쌓일 때까지 풀지 못했다. 올해로 14 번째 지층을 쌓으면서,

 

‘이런 인생을 살아서 뭐하나…… 그냥 콱!’

 

하는 자괴감이 자존심을 막 손상시키려 할 때, 하늘의 계시와도 같이 회사에서 책 한 권을 나눠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제목은 [책 읽는 뇌]였다. 나는 별 의도 없이 그저 심심하니까, 그저 출퇴근하는 데 지하철을 오래 타서 지루하니까 펴봤다. 그리고 잠시 후,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 어쩌면 나의 글에 대한 열망, 책에 대한 열망이 나를 이처럼 똑똑하고 영민하고 해박하고 완벽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처음 몇 장까지는,

 

‘이 책도 이미 다 아는 내용이구나, 별 거 없네.’

 

했었지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다 보니 미처 생각지 못한 0.1% 가 있었고(몰랐던 게 아니라 미처 생각지 못한 거다. 이런 0.1% 가 신과 나의 유일한 차이다), 그 0.1% 를 통해 내가 이렇게 완벽하고도 멋진 인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그건 바로 글이었다.

 

“안녕하세요, 역마살입니다. 저는 책과 글을 통해 이렇게 세상이 인정하는, 아니 적어도 내 고향 대구광역시에서는 인정하는, 아니 적어도 내 친구, 우리 회사, 우리 가족은 인정하는 천재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엄마, 아빠의 공도 약간 포함되어있는데, 이는 유전자적 관점이 아니라 교육환경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렇다. [책 읽는 뇌]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 유치원에 들어가는 연령이 될 때까지 언어적으로 빈곤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풍부한 자극을 받고 자란 아이 사이에는 이미 3,200 만 개 어휘의 격차가 벌어진다. >

 

천재인 나 덕분에 우리 엄마, 아빠가 자식을 키우기에 적합한 교육환경을 제공한 이상적인 부모가 된 것이다. 자식이 천재라는 이유로 값진 어부지리를 얻은 셈인데, 사실 나 같은 천재는 환경이 아무리 나빠도 천재가 됐을 테니 우리 엄마, 아빠가 억세게 운이 좋은 거다. 그러고 보면 나도 알게 모르게 효도를 참 많이 하는 자식이다.

 

위에 인용된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바로 이런 거다. 때는 바야흐로 내가 두 살 때, 그러니까 지나다니는 자동차를 보고 내연기관의 원리와 뉴턴(Newton)의 운동법칙 3 가지를 모두 깨치던 그 때……를 예로 들면 아마 다들 믿지 않을 테니 그냥 현재의 예를 들어보자.

 

“자,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눈(雪)’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하얀 겨울, 교통지옥, 화이트 크리스마스(White Christmas), 육각형, 녹으면 물, 눈싸움? 약합니다. 그러면 이문세의 ‘옛사랑’과 함께 떠올리게 되는 그녀와의 눈 속 추억, 눈 오는 날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한 눈의 생성원리, 함박눈, 겨울아이, 싸락눈, 설질, 가루눈, 진눈깨비, 설국, 눈보라, 설중매 등 눈과 관련이 있는 단어들의 저변에 흐르는 공통된 의식, 한겨울에 덕유산에서 야영을 하며 백숙을 해먹기 위해 눈을 녹이던 기억? 너무 평범하죠? 그러면 CJ 그룹(Group)이 왜 눈(雪)과 관련이 있을까, 일본 자오온천스키장(藏王溫泉 Ski resort)에 있는 쥬효(樹氷),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네팔 포카라(Nepal Pokara)에서 바라본 마차푸차레(Machapuchar), 먼 데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스키(Ski)를 처음 타보는 영국계 호주분들과의 스키장에서의 추억? 이제 간이 좀 맞나요? 그리고 ……”

 

적을 게 끝도 없이 많지만 이쯤에서 접어야겠다. 이럴 때마다 가슴이 참 찢어질 듯 아픈데, 나의 가진 무한히 깊고 높고 넓은 사상, 지식, 지혜, 경험을 현실이 다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나의 천재성을 스스로 제약하면서 살아야 할까? 21 세기 초인 현재야 시간이 제한되고 지면이 유한하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언제쯤이면 나의 사상과 지식과 지혜와 경험을 오롯이 수용할 수 있는 매체가 등장하게 되는지 대충이라도 좀 가르쳐줘야 하지 아닐까? 나더러 마냥 이렇게 스스로 제약하면서 살아가라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인 것 같다. 너무 힘들다.

 

답도 없는 넋두리는 그만두고 어쨌든 위에 적은 나의 눈(雪)에 대한 견해와 대비되도록 “눈(雪)!” 했을 때 고작 5 개 내지 10 개 정도의 의미만 읊고 마는 사람이 세상에 부지기수라는 말에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게 과연 ‘인간의 삶’인가 싶다. 매년 겨울이면 어김없이 눈이 내리는데, 한 해에 한 의미씩만 더해도 20 년이면 스무 개고, 30 년이면 서른 개다. 다섯 개 내지 열 개라는 말은 자기가 다섯 살 내지 열 살밖에 안 된다는 말하고 같은 뜻이다. 적어도 눈(雪)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정말로 답답하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눈에 대해 많은 것을 떠올리려면 우선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책을 통해 간접경험도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눈(雪)과 관련된 TV 프로그램(Program)이나 지식검색으로는 얻어질 수 없는 것…… 이라는데…… 왜일까? 뭐라도 한 번 보고 나면 즉시 해석되고, 분석되고, 흡수돼서 전부 자기 것이 되는 게 당연한데 왜 TV 나 인터넷(Internet)은 안 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책 읽는 뇌]가 내놓았는데, 별로 마음에 안 든다. 그 내용을 아래에다 대충 요약해서 적어놓긴 했는데 어째 시간낭비인 것 같기도 하고, 지면낭비인 것 같기도 하고, 인력낭비인 것 같기도 하고…….

 

< 일반사람들이 글자를 읽을 때 그것을 시각적으로 인지하는데 0.1 초, 단어 고유의 뜻을 찾아내는 데 0.05 초, 단어를 음운론에 따라 해석해내는 데 0.15 초, 마지막으로 그 의미를 알아내는 데 0.2 초 정도 걸린다. 도합 0.5 초다. TV 화면이나 인터넷의 정보는 이보다 더 빠르게 지나간다. 그래서 안 된다. >

 

‘단어 하나를 읽는데 0.5 초씩이나 걸린다고? 그러면 백과사전 한 권을 다 읽고 이해하는데 일주일이 모자란단 말이네? 말이 되나? 쯧쯧쯧, 불쌍도 해라, 그러니까 TV 를 바보상자라 하고, 인터넷을 얕은 지식의 쓰레기통이라고 하면서 오해나 하지! 보고, 해석하고, 분석하고, 흡수하는 자기들의 능력이 많이 뒤떨어지는 건 생각지도 않고……. 책 제목을 [책 읽는 뇌]가 아니라 [일반인의 뇌]로 확 바꿔버려야 돼!’

[일반인의 뇌]에는 이런 것도 적혀있었다.

 

< (일반)사람들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기 위해 다음 3 단계를 거친다. 1 단계, 기존에 갖고 있던 사고의 구조를 새로운 방식으로 종횡 연결한다. 2 단계, 새로 연결된 사고의 방식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다듬어서 특화된 기능을 하는 하나의 영역으로 만든다. 3 단계, 새로운 사고방식을 요하는 일이 생기면 이 특화된 영역에서 처리하도록 한다. >

 

그런데 과연 이게 최선일까 싶다. 날 놀리려고 일부러 이러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책을 쓴 이나 번역한 이만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한 번에 다 하면 되지 왜 뇌 안에다 무슨 특화된 영역을 만들고, 어떤 일이 들어오면 그에 맞는 영역에다 작업을 시키고, 그 결과를 받아서 다시 가공하는 뭘까? 일반사람들은 정말 너무 복잡하게 사는 것 같다. 그러니까 사회가 이 모양으로 복잡하지. 질문이 나오면 100% 가동해서 바로 답을 내고, 문제가 생기면 100% 가동해서 바로 풀고, 다툼이 생기면 합리적인 선에서 최선의 답을 구하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난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지 모르겠다.

 

난독증은 또 어떻고! [일반인의 뇌]에서 말하기를,

 

< 원래 (일반)사람들의 뇌 중에 좌뇌가 독서를 하는 데 특화되어있고, 어떤 이유에서 이 특화된 좌뇌를 쓰지 않고 우뇌를 이용해서 독서를 하는 다른 (일반)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책을 읽는 데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난독증이라고 표현한다. >

 

그런데 나중에 이런 사람들이 난독증을 고치고 나면, 그 전에 독서를 하기 위해 개발해둔 우뇌의 회로가 다른 창의적인 용도로 전용되면서 일반적인 (일반)사람들보다 훨씬 창의적인 (일반)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뭐? 그 때 그 때 놀고 있는 뇌를 쓰면 되지 좌뇌는 뭐고 우뇌는 또 뭔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우리 같은 천재는 그렇게 안 산다. 우리 같은 천재의 뇌는 모든 부위가 모든 일을 잘 해내기 때문에 언제나 100% 대기상태고, 언제나 100% 가동된다.

 

결론 : [일반인의 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사회가 이 정도로 꾸려져 나가고 있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임을 알겠다. 그래서 ‘한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 하면서 자화자찬하나 보다. 아~ 정말이지 세상은 천재가 살아가기에 너무 밋밋한 것 같다. 매우 질겨서 이해하기 어렵고, 알면 알수록 쫄깃쫄깃해지는 그런 어려운 지식이 어디 없을까? 오늘따라 세상이 너무 싱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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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성자 : 역마살

원    글 : http://blog.naver.com/dondogi/100129271243

글쓴날 : [11-05-30 00:53] 파워블로거타임즈기자[pbatimes@pb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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