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심을 먹고 김장체험장을 벗어나 뒷산에 올랐다. 나지막한 뒷산이라고 해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건 아니고 그저 중턱에 있는 산소에 올라 주변풍경을 구경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김장체험장으로 사용되는 폐교도 완벽하게 내려다보였다. 구석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저 골……초……들…… 딱 걸렸어!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겠지만 산소의 위치가 가히 예술이었다. 햇빛이 잘 들고, 물 들 일 없고, 마을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 비교적 최근에 모셔진 산소로 비석에 2001 년이라고 적혀있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았다. 김장하면서 챙겨둔 배추속고갱이와 삶은 돼지고기의 완벽한 조화 때문에 입만 알고 배를 몰랐더니 뱃구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헉헉거리다 못해 나중에는 섹섹거렸다. 급기야 눈알까지 튀어나오려 했다.
‘역마살아, 너도 이제 나이가 마흔에 가까워가잖아. 배도 좀 생각하면서 먹으렴…… 뭐라고? 싫다고? 좋은 말로 타이를 때 좀 자제해 봐…… 뭐라고? 싫다고? 말로 할 때 좀 작작 쳐먹어라, 이 수육보다 못한 돼지야! 똥구멍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산소 옆으로 오솔길이 나있었다. 비탈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길이었고, 동네방향이었다. 나는 길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오솔길의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잡초와 나무들이 발걸음을 성가시게 했지만 다행히 길이 끊기진 않았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산모롱이고,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다시 산모퉁이였다. 그러기를 서너 번…… 뒷산이 낮은 만큼 산모퉁이도, 산모롱이도 금방 다가오고 금방 지나갔다. 날이 깡마르다 싶은데도 시냇물이 졸졸졸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형태를 보고 내가 의성어 ‘졸졸졸’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진짜로 ‘졸졸졸’ 들려왔다.
시내를 건너니 수확이 끝난 깨밭이었다. 섬이쌍겨리마을 을 통틀어 산과 마을의 경계는 모두 밭인데, 내가 가로지른 깨밭이 그 중에서도 산 쪽에 가장 가까운 밭이었다. 나중에 지도를 보면서 어림잡아보니 이 날 나는 마을의 4 분의 1 을 외곽으로 빙 돌았다. 저 앞에 사당 같은 건물이 한 채 서있길래 가보니 현판에 선화제(宣化齊)라고 적혀있었다. 그리 오래된 건물은 아닌 것 같고…… 정확히 뭐 하는 건물인지 모르겠다. 마을에서 가장 높고 좋은 위치에 있는 걸로 봐서 예사롭지 않은 건물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누구 아시는 분 계시면 좀 가르쳐주세요,^^
선화제에서 김장체험장까지 마을을 쭉 가로질러갔다. 밭이 흔하고, 개가 흔하고, 산이 흔하고, 사람이 드문 마을이었다. 개로 말할 것 같으면, 집을 지키라고 놔뒀더니 생판 모르는 나 같은 놈에게 꼬리부터 흔들고 보는 개도 있었고, 겁에 질려서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끊임없이 짖는 개도 있었다. 내 생각에…… 이 녀석들…… 제명에 못 죽는다. 아니, 제명에 죽어선 안 된다. 똥개급 개들의 고기 질이나 산골농촌이라는 지역적 특성이나 개고기의 맛을 결정하는 환경적 요인 등을 고려해볼 때, 이런 양질의 개고기 공급원이 제명에 죽어선 안 된다. 혹시 잡으실 때 연락 한번 주시면 안 될까요?

진짜 외양간과 진짜 한우도 있었다. 산업으로 키우는 한우 말고 외양간에서 키우는 한우를 본 게 얼마만인가 싶다. 편견인지 몰라도 섬이쌍겨리마을의 한우들 또한 제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마을 곳곳에 서있는 볏짚단들도 ‘의좋은 형제’ 고사가 자연스레 떠오를 만큼 높다랗게 서있었다. 섬이쌍겨리마을 안내도가 마을 중간에 서있었다. 언급된 섬이쌍겨리마을의 마을 내 지명을 쭉 나열해보면, 마을회관, 섬이학교, 매봉산, 모롱고지, 큰버뎅이, 논골, 부채골, 마루들, 보매기, 구만이버뎅이, 여우박골, 천삼두지, 싸릿골, 느티나무당산목, 돼지흘레골, 지풍매기, 사슴소, 선이고개길, 용구데미, 용소골, …… 그렇게 친근할 수 없었다.

쉬엄쉬엄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건방진 개 한 마리. 금방 불을 피우고 치운 자리에…… 사지를 쫙 펴고 누워서 찜질을 하고 있는…… 아주 건방진 놈! 이 놈의 개는 뜨끈뜨끈한 찜질이 어찌나 좋던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눈꺼풀만 슬쩍 들어보고는 다시 감았다. 꼬리도 드러누운 채 아주 미세하게 흔들려다 말 뿐이었다. 대가리를 건드려도 눈을 게슴츠레 뜨려다 말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개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나눈 선문선답……
‘어이, 개! 넌 개고 난 인간이야. 이 시점에 너는 발딱 일어나서 꼬리를 흔들어야 하는 거라고. 니가 지금 이렇게 낭창하게 누워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지. 당장 일어나서 꼬리를 흔들지 못해? 이게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이 노네? 찜질 후 수육하고 싶어?’
‘어이,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내가 찜질 좀 하겠다는데 자꾸 방해할래? 그렇게 인간대접을 받고 싶으면 먼저 인간이 되라고! 인간부터 돼서 오라고, 이 변태야!’
‘켁! 너 혹시 내가 마을을 도는 사이 은영이한테 사주라도 받은 거야? 그런 거야? 나랑 처음 본 개가 어떻게 은영이하고 똑같은 말을 내게 할 수 있어? 혹시 몸뚱어리만 개지 속은 은영이 아니야? 뜨끈뜨끈한 데서 지지는 걸 좋아하고, 내가 미처 인간이 되지 못한 걸 다 알고……. 넌 분명 은영이의 화신이거나 은영이로부터 사주를 받은 거야.’
개가 누워있는 자리도 폐교로 가는 길목이었다. 은영이가 사주할 시간이 충분했다. 순간 개가 달리 보였고, 재나 검댕 따위는 아무 상관없이 뒹굴어도 좋은 개가 부러웠다.
다시 한번 적는 거지만, 이 마을의 공식명칭은 섬이쌍계리마을이다. 행정주소는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석산2리다. 솔직히 그렇게 내세울 것이 있는 농촌마을은 아니었다. 때묻지 않은 산이 있고, 맑은 물이 있고, 신선한 공기가 있어서 그렇지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멋진 볼거리는 전무했다. 굳이 내세울 것을 찾자면…… 산골오지 같은 느낌? 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 이렇게 오지느낌이 나는 곳은 처음이다. 내 고향은 이미 대도시니 접어두고…… 어머니의 고향 같은 곳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를 되새기며, 차가워진 가슴을 훈훈히 데울 곳이 필요하다면 바로 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