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줄거리 >
역마살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고려불화대전]을 매개로 하여 우리나라 불교를 알고자 한다. 알아가는 방식은 바텀업(Bottom-Up) 방식이며, 그 첫 수확으로 지장보살과 그의 졸개들을 뗐다. 역마살은 쉬지 않고 지금도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고려불화대전]으로 우리나라 불교 때려잡기 제 2 탄, 관음보살을 치자. 비교적 독보적이고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인 지장보살과 달리 관음보살은 부처님의 왼팔 역할을 확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관음보살이 때려 잡힌다면 부처님이 바로 들고 일어나 자기도 알아보라며 덤빌까 심히 걱정된다. 하지만 그게 무섭다고 마냥 변죽만 울리고 있을 순 없는 일, 그래서 나는 지장보살 다음 차례로 거물급을 치기로 했다. 이런 나의 무지에 가까운 자신감에는 지장보살이 의외로 쉽게 쳐진 데 대한 만용이 녹아있다. 어쨌든 가보는 거다. 치다가 안 되면 다시 저 말단꼬리를 치러 갈 값이라도 우선 대물 하나 건지고 보자.
관음보살은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세상 모든 것을 관조하고 세상 모든 소리를 들음으로써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육도를 드나들며 그 곳의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지장보살과는 그 역할이 다른 것이다.
나는 지장보살 때의 경험을 되살려서 관음전으로 향했다. 진짜 아무 것도 모를 때, 나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을 것 같아 무작정 지장전을 찾아갔고 거기서 지장보살을 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관음전으로 가는 거다. 관음전이 관음보살을 모시는 곳이지 관음증을 치료하는 곳은 아닐 테니까. 나는 관음전의 문을 열고 살며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누가 볼세라 신속하고도 조용히 문을 닫았다.
관음전의 내부는…… 일반 전각의 내부와 판이하게 달랐다. 전각의 내부라기보다 차라리 청명한 심산유곡의 아름다운 한 부분을 떼다 옮겨놓은 곳 같았다. 벽은 편편하면서도 매끈한 벽체 대신 울퉁불퉁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암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기둥은 곧게 잘 깎인 재목 대신 어지러이 휜 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면과 기둥을 대신하는 기암괴석 사이로 폭포수가 찬란한 빛을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는 폭포수로부터 이어진 물길이 신묘한 문양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고, 물길 주위로 기이한 모양의 산호와 영롱한 빛깔의 꽃들이 빼곡히 피고 자라고 있었다. 물길이 소를 이룬 곳에는 연꽃이 소담하게 피어있어 너른 빈틈이 풍경의 조화를 깨는 것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바닥과 벽면이 만나는 구석진 곳에는 대나무가 우후죽순 솟아있어 기암괴석, 폭포수, 물길 등과 아주 잘 어울렸다. 봉창을 통해 들어오는 산바람과 폭포수가 일으키는 물바람에 몸을 실을 꽃과 나무가 스스로 너울너울 춤을 쳐댔다.

나는 꿈에도 미처 생각지 못한 관음전의 내부풍경에 놀라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혼미해졌다. 기암의 향기, 괴석의 향기, 산호의 향기, 꽃의 향기, 나무의 향기, 물의 향기, 폭포의 향기가 나를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나를 에워쌌다. 얼마나 흘렀을까?
“잘 왔다, 역마살. 일어나서 한 잔 하거라.”
나는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보다 가냘프되 범접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음색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음성이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한 손에는 연꽃…… 한 손에 정병…… 여성스러운 자태…… 화려한 장식…… 영락없이 관음보살이었다. 관음보살은 기암이 자연스럽게 형성해놓은 암좌에 앉아 나에게 정병을 건네고 있었다.
“한 잔 하라니까.”
나는 아무래도 술인 것 같아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사실 넙죽 받아서 한 잔 들이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쩌면 나를 시험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극히 조심했다.
“아니다, 이건 술이 아니라 약이다.” / “그래도…….”
관음보살이 약이라 했고, 관음보살이 거짓말을 할 리 없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다. 때로는 술이 진짜로 약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술을 약이라 하며 건네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인구에 회자되는 스님들의 곡차이론이 혹시 여기서 파생된 것은 아닐까? 나는 두어 번 더 사양하다 마지못해 정병을 받아 들었다.
“입대고 마셔도 되나요?” / “그러려무나.”
첫 모금은 맛을 보기 위해서 조금, 그리고 두 번째 모금부터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정병에 담긴 것은 약도 아니고, 술도 아니고, 그냥 물이었다. 태초의 물맛이 이랬을 것 같은 맑은 물이었다. 나는 감로수를 입에 대고 나서야 목이 많이 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게 정병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관음보살은 외모도 멋있었지만, 처음 보는 나를 향해 감로수부터 한 잔 건네고 보는 마음까지 멋쟁이 보살이었다. 기암의 암좌에 앉아있는 자세 또한 기품은 기품대로 챙기면서 간들간들한 아름다움은 아름다움대로 한껏 발산하는, 차라리 예술이었다. 순간순간 자세를 고쳐 앉는 모양새 또한 어찌나 황홀하던지, 손끝 조금, 발끝 조금, 고개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그 미의 광풍이 내 마음을 쓰러뜨리고 지나갔다. 나, 관음보살을 치러 온 사람 맞니? 이렇게 황홀해하고만 있어도 되는 거야? 나는 관음전에 든 이후 계속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아니, 정신을 차리기 싫어하고 있었다.
관음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일으키는 먼지 한 톨까지 모두 고귀한 금은보화가 되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입고 있던 천의와 사라를 관음보살이 다시 고쳐 입자, 나풀거리는 천의와 사라에서 다시금 한 무더기의 금은보화가 떨어졌다. 너무 행복했다. 천의와 사라를 입고, 천관을 쓰고, 버드나무가지와 정병을 들고 서있는 관음보살의 모습은 이승의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어에 형용사가 이다지도 모자라나 싶었다. 한편 두렵기도 했다. 관음보살의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이렇게 나 혼자만 기억하고 있다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곳으로 사라지게 놔둬도 되는 것인지 두려웠다. 한참 뒤떨어지는 상거지 같은 서술일지라도 일단 그리고 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그리자니 두렵고, 그렇다고 안 그리자니 더욱 두려웠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그려보기로 했다.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몸에는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충만한 자만이 취할 수 있는 도도함이 베어있었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표정에는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달은 생명체만이 누릴 수 있는 안온함이 피어있었다. 서있는 관음보살의 자태와 뒷배경이 되는 관음전의 풍경 간에 아주 미미한 흠집이라도 보일라치면, 관음보살 뒤로 둥근 달이나 물방울이 떠올라 황금비를 맞춰줬다. 관음보살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달이나 물방울이 자리를 옮겨 황금비를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게다가 관음보살이 비록 맨발이긴 하지만, 연꽃이 화사한 연좌대에 발을 항상 올려놓음으로써 발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나 같은 중생들이 관음보살의 발냄새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섬세한 배려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알아챈 후, 나는 나도 모르게 관음보살을 향해 합장했다. 다리가 아프면 무릎을 꿇되 합장한 손만은 절대 풀지 않았다. 이러한 내 모습이 관음보살의 수려한 자태와 관음전의 신묘한 배경에 자연스럽게 흡수되면서 영원히 남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이것을 [양류관음도]라 불렀다. 나는 분명히 역마살인데…… 사람들은 나를 선재동자라 불렀고, 나는 분명히 관음보살을 치러왔는데…… 사람들은 내가 선지식을 찾아다니던 중 28 번째로 관음보살을 찾아왔다고 믿었고, 내가 들어온 곳이 분명히 관음전인데…… 사람들은 내가 선 이 곳을 보타락가산이라 여겼다. 여기에다 혜허라는 사람이 ‘해동치납혜허필(海東癡衲慧虛筆)’이라는 명문까지 남기다 보니 사람들이 이를 더더욱 사실로 받아들이게 됐다.
“법을 구하려느냐?”
관음보살이 내게 물었다. 나는 관음보살의 물음을 부정하며 당당히 대답했다.
“저는 법을 때려잡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뗄 것이옵니다.”
관음보살은 나를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나에게 설법하기 시작했다. 아는 바를 모두 설법하기로 작정했는지 관음보살의 설법은 끝이 없었고, 나는 관음보살의 설법의 토씨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고 기억하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관음보살이 자연스럽게 쳐졌다. 설법이 끝남과 동시에 관음보살이 쓰러졌다.
나는 관음보살이 쳐진 걸 재차 확인한 후, 관음보살의 넘버 투(No.2) 남순동자와 넘버 쓰리(No.3) 해상용왕이 찾기 위해 관음전 내부를 살폈다. 그렇다고 기암괴석을 타넘고, 폭포수를 맞으며 이들을 찾아다닌 건 아니었다. 아무리 관음보살이 쳐졌기로서니 관음보살이 살던 보타락가산을 내 집처럼 헤집고 다닐 순 없는 일이었다. 그저 눈으로만 살펴보았다. ……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찾아다니는 걸 포기하고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 5 분, 10 분 하던 것이 1 겁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래도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이들을 포기하고 관음전을 떠났다.
관음전을 떠나면서 곧장 대웅전으로 향했다. 관음보살까지 때려잡은 이상 부처님 전으로 나아가는 것을 미룰 수 없었다. 시간은 부처님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