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위한 오프라인 힐링 캠프

 

눈이 온 후 바람이 차가워진 월요일 입춘 저녁, 모 방송국에서 ‘힐링 캠프’를 방영하는 날이다.

그런데 서울 마포구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에서는 ‘강정마을 수호천사 돕기를 위한 힐링포차’ 마당이 열렸다.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개장시간부터 계속해서 손님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협소한 공간의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많은 손님들이 서둘러 음식을 먹고 자리를 떴다.

취지가 그러하기에 이곳에서는 최대한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최고의 도움이다.

행사가 열리는 것을 모르는 행인들도 한 번씩은 눈길을 주거나 잠깐 멈춰서 관심을 보였다.

포장마차 내부는 공간적인 제한 때문에 넓지 않았지만 음식들은 바깥에서 준비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공간을 활용하고 있었다.

 

또 행사의 취지를 알리기 위한 밴드 공연과 미니숍도 열렸다.

환경과 평화를 위해 제주에서 싸우던 사람들은 이제 사법 현실과 싸우기 위해 수도권 번화가로 나섰다.

수도권 투어를 마치고 나면 전국 투어 일정으로 확대한다고 한다.

이 행사를 통해 사람들은 그나마 한 번쯤 그들의 메시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번 힐링포차 수도권 투어는 ‘강정마을 사태’와 관련되어 기소되고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을 돕기 위한 행사다.

강정마을 농성과 관련해 20대 초반의 젊은이 12명이 법원으로부터 각각 4백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들 젊은이뿐만 아니라 강정마을 농성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선고된 전체 벌금만 약 5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환경과 평화를 위해 싸웠다. 그리고 이젠 사법 현실과 싸운다.

 

힐링포차는 4백만 원을 도저히 낼 수 없어 노역을 살겠노라던 한 20대의 동료인 제주도 여학생의 어머니가 제안하여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돈 4백만 원이 없어서 징역이나 다름없는 노역을 사는가?’라고.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벌금 낼 돈이 없어 노역을 살고 있다.

 

하루로 환산되는 환형유치금(벌금을 낼 수 없어 대신 노역장에서 일하는 것을 환형유치라 한다)은 대개 젊은이를 기준으로 5만 원가량이다.

80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노역장에서 일해야 한다.

주5일로 치면 16주 넉 달이다.

 

최근 형법상 징역형이 1개월 이상으로 줄었다.

그러니 노역이 징역보다 더 가혹한 경우까지 생긴다.

노역장은 어느 노래 가사처럼 ‘문 열린 감옥’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20세기보다 어쩌면 더 가엽고 처량하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8년을 감옥에 산 장 발장을 다룬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가여운 사람들이란 의미의 프랑스어)’이 문득 가슴을 스친다.

장 발장(Jean Valjean)은 빵이라도 훔쳤지만, 우리의 20대 청년들은 무엇을 훔쳤기에 이토록 가혹한 두 개의 겨울을 보내야 하는가?

 

힐링 포차는 2월말까지 수도권을 순회하고 그 이후 전국을 순회할 예정이다.

 

Healing for Char! 숯덩이가 되어버린 마음들을 위하여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인 제주자치도 서귀포시 강정(동)마을은 남제주 제주중문단지와 서귀포항 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 조용한 마을이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로 지정되면서 한바탕 풍파가 마을을 휩쓸고 갔다.

마을이 찬반으로 갈려 두 동강 났고, 제주도가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렇게 두 동강 났다.

강정포구를 군항이자 민항으로 개발하는 방안이 채택되면서 강정마을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애초에 환경 보호와 제주도의 평화를 지키려는 마음으로 해군기지 저지에 나선 사람들에게는 물론 일단락이란 표현이 맞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제주도 지역민들과 정치권, 여론까지 관심을 접었다.

그리고 사법부의 벌금형 선고는 제도권이 지킴이들에게 던져준 마지막 관심이었다.

 

대한민국에서의 이슈란 게 항상 그렇듯, 강정마을 사태는 반대한 사람들이 지녔던 애초의 순수한 의도는 잊히고 주변인들의 이전투구와 언론의 황색보도, 정부와 정치인들의 여론 몰이와 국론 분열, 그리고 망각으로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에서는 항상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은 싸움을 해야 한다.

이긴 편도 진 편도 모두의 마음은 숯덩이가 된다.

그러니 이번 ‘힐링포차’는 어쩌면 우리 국민 모두를 위한 행사인지도 모른다.

 

취재를 하던 날 여론의 관심을 끈 뉴스 중 하나는 제주도의 토지를 중국인들이 싹쓸이 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그 뉴스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하와이 섬’이었다.

원래는 미국이 아니었던 땅, 그리고 해군기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진 섬, 전후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인 일본인들이 싹쓸이 하다시피 한 하와이.

 

우리는 모두 똑같이 옳은 것을 위해 싸웠을 뿐이다.

 

물론 세계의 돈줄을 쥐고 있는 미국은 하와이를 비롯해 많은 미국 땅을 사들이던 일본인들을 그저 방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마음만 먹으면 다시 되찾을 수 있다는 여유에서 비롯된 의도된 방관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때 일본인이 절반 이상을 사들였다는 하와이가 여전히 미국 땅이고 미국을 대표하는 섬일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진주만에 자리한 해군기지 덕분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한다.

60년을 넘게 군대가 자리 잡을 수 없었던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새로운 동북아 패권 경쟁에서 우리가 해군기지 건설을 통해 지리적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은 당연히 제주도다.

 

그렇기에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동북아를 대표하는 섬으로 제주도가 우뚝 설 수 있는 방법은 세계 7대 자연 경관으로 선정되는 일보다 해군항의 입지를 세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물론 환경 훼손과 동북아 긴장 고조의 문제를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해군기지 건설의 반대급부로 주어지는 것들 역시 환경이나 갈등 해소에 비해 결코 작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다.

 

무엇이, 왜 어머니를 거리로 나서게 하였나?


Heeling? Hilling? Healing! 측은지심은 국가의 큰 미덕이다

 

우리 역사에서 늘 이방인이었고 소외되었던 제주도민들에게 제주도가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서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제주도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고 자치도가 되면서 주변국 자본가들이 제주도에 군침을 다시고 있다.

그러니 제주도를 대한민국 땅으로 붙박아 두어야 할 국가적 과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그 누구보다 제주도민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결정하도록 맡겼어야 했다.

환경운동가나 반전평화운동가들의 이상과 헌신에서 비롯된 참여를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환경이나 평화는 국가의 작용을 이해하는 보편적 시각에서는 절대적 진리나 정의가 아니다.

환경이나 평화를 위해서는 다른 많은 것을 희생시키거나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자꾸 끼어들거나 분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원자력 발전소나 방사성폐기물처리장, 해군기지 건설은 현실적인 문제다.

당장 다른 대안이 없을 뿐더러 그것들이 없으면 국가의 근간이 흔들린다.

 

우리나라 어딘가에는 반드시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해당 시설들을 유치하는 문제에 있어서 지역 주민들의 의견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필요악인 시설을 유치하는 문제에 있어 외부인들, 특히나 그 시설들의 혜택은 다 누리고 있는 외부인이 나서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그들에겐 벌금이 없지만 용기라는 큰 상금은 있다.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도덕과 환경 보호의 잣대를 들이대는 닛비(NITBY, Not In Their Back Yard,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대안 없는 도덕주의)는 오히려 갈등과 상처를 조장하고 비용을 증대시킬 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환경운동이나 여성운동은 너무 멀리 갔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것이지만 마치 환경이나 여성의 권리가 절대선인 양하는 태도가 대중들에게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제주도 강정마을 사태도 외부인들의 지나치게 이상적인 논리와 끼어듦이 도를 넘어섰고 갈등을 악화시켰다.

자신들과 입장을 달리 한다고 해서 국가를 지키는 군인을 ‘해적’이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동가들은 사태를 너무 극단적으로 몰고 갔다.

그렇게 해서는 여론의 옹호도 받기 힘들다.

 

그런데 지킴이들이 과도한 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정부 역시 관용을 보여야 할 큰 미덕을 잃었다.

많은 생채기가 나긴 했어도 어쨌거나 정부나 제주도민들이 바라는 대로 결론이 났다.

그러니 그 많은 분열과 생채기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관용이라는 치유(힐링, Healing)가 필요했다.

잘못한 점이 있더라도 애초에 나쁜 의도를 지닌 사람들이 아닌 선량한 소시민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가 지켜주어야 할 우리 국민이 아닌가?

 

‘레 미제라블’에서 자베르는 법적 정의를 세운다는 신념 하나로 평생 동안 장 발장의 뒤를 캔다 (Heeling, 뒤쫓음).

하지만 자신이 목숨처럼 여기던 ‘사법적 정의’라는 것이 과연 ‘인간’보다 우선일 수 있는가 하는 갈등 앞에서 고뇌하다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지성 알베르 까뮈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정의를 목숨처럼 사랑한다. 하지만 정의가 내 어머니에게 총을 들이댄다면 나는 정의에 맞서 싸울 것이다.’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관용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사회는 관용의 우산이 필요하다.

 

정의의 저울 오른편에는 내가 있고 왼편에는 네가 있다

 

정의를 지키는 것은 국가와 사법권이 수호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하지만 그 정의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보아야 한다.

물론, 그 정의 안에는 법질서를 수호해야 할 덕목도 포함된다.

하지만 적어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행동한 사람들을 악착같이 뒤쫓아가 벌을 주는 것이 덕목은 아닐 것이다.

까뮈의 언급 역시 ‘정의’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인간에 대한 연민’ 즉 ‘측은지심’이나 ‘휴머니즘’은 정의(正義, Justice)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인간’이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까뮈는 그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장 발장은 자베르로 대표되는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자고 전과자며 가석방 조건을 위반한 재범자다.

그럼에도 장 발장은 가엽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이며 국가나 국가 지도자가 측은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겨울날의 언덕 꼭대기에서 힘들게 바람에 맞서고 있다.

그 언덕 아래로는 끝없는 눈길과 얼음길이다.

조금만 삐끗하면 끝없이 굴러 떨어져야 한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 사람들이 안전하게 언덕을 내려오게 하는 일이다.

그들을 언덕에 세워두거나 아래로 떠밀어서는 (Hilling, 언덕에 세워두기)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가 애초에 이 젊은이들을 기소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고, 또 사법부나 행정부가 관용을 베풀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측근들에게 사면의 은총을 베푸는 대통령이 아니라, 이런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대통령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번 ‘힐링포차’를 계기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또 하나가 있다.

바로 형벌제도 중 하나인 벌금형과 환형유치(노역)에 관한 것이다.

벌금형은 비교적 죄가 가벼운 사람들에게 징역형 대신 금전적 손실을 통해 죗값을 치르게 하는 제도다.

교정시설이 포화되어 막대한 조세가 투입되는 것을 막고, 교도소에서 교화가 아니라 재범자화 되는 나쁜 영향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형사정책적 고안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온 국민의 치유가 필요한 때다.

 

국가의 세수를 증대시킬 수 있고, 벌금 일부를 피해자나 신고자에게 지급하여 손해를 배상하거나 공적을 보상하는 기능도 한다.

감옥보다 더 무서운 것이 금전 손실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범죄 예방과 교화의 효과가 어느 정도 입증된 것도 진실이다.

흉악범죄자가 아닌 이상, 벌금형을 확대하는 것은 인권 보호에 긍정적이며 범죄 재발 방지에도 효과적이다.

 

그런데 이 벌금형이라는 것의 취지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벌금형은 단기의 징역형을 사는 대신 돈을 내게 하는 금전형이다.

애초에 죄에 상응하는 금액을 정해주고 벌금을 내지 못하면 노역을 살게 하자는 개념이 아니다.

그 사람의 죗값에 상응하는 징역 일수가 있는 것이고, 그 징역 일수에 상응하는 금액을 환산하여 납부토록 하는 것이 원래 취지에 더 부합한다.

환형유치(換刑留置, 벌금액수에 상응하는 만큼 노역으로 갚게 하는 것)가 아니라 환금석방(換金釋放, 징역일수에 상응하는 만큼 돈을 내고 귀가하게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에 1억을 버는 사람도 있고 하루에 만원 벌기도 힘든 사람이 있다.

이것이 많은 선진 국가들이 소득에 따라 벌금을 차등해서 매기는 이유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돈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대기업 총수는 하루의 징역형을 면하기 위해 1억이라도 낼 수 있어 기꺼이 그렇게 하겠지만, 서민은 5만원을 낼 수 없어 노역을 택하는 현실은 불공평하다.

 

이것은 누가 봐도 정의가 아니다.

최근 사법부는 벌금형의 징벌적, 예방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벌금형의 형액 기준을 대폭 높였다.

그 방향이나 의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법의 요소 중 하나인 ‘정의’의 관점에서 고민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4백만 원을 한 시간의 유치장살이와도 바꿀 용의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4백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소득도 없는 20대 초반 대학생에게는 한 학기 대학등록금에 맞먹는 큰 액수다.

더구나 그것이 국가의 환경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나선 사람에게 주어진 형벌이라면 더더욱 가혹하다.

강정마을 사태가 남긴 또 하나의 고민거리자 교훈이다.  

글쓴날 : [13-02-07 05:26] 김세호기자[saengtaeng@pb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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